3. 서양 과학기술 지식
실제 의료 및 기술에 관한 정약용의 지식과 활동에서도 서양 과학 기
술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종두법種痘法에 관한 그의 지식과 활동이
좋은 예 이다. 인두人痘와 우두牛痘, 종두법 각각에 대해 그가 얼마만큼
알고 있었고, 그것이 조선에 도입되고 실시되는 데에 있어 그의 기여도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정약용은 이 두 가지 종두
법 모두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실제 시술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
인다.
의학의 잡다한 주제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모아 엮은 [의령醫
零]의 「육기론六氣論」· 「뇌론腦論」· 「근시론近視論」· 「약로기藥露記」 등
여러 편들의 내용에서도 서양 의학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그는 정조
의 명으로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조해 여러 개의 도르래를 사용하여
기중기起重機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화성華城 축성築城에 사용되어 4만
냥의 경비를 절약하도록 해 주었다고 「자찬묘지명」에 쓰고 있다. 그는
서양의 수차水車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태서수법泰西水法]을 전
재轉載한 서광계의 [농정전서農政全書]를 통해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서양 과학기술 지식은 이상에서 열거
한 것들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사상과 저술 속에서
서양 과학기술 지식의 비중은 낮았던 것이다. 물론 천주교 탄압이 지속
되는 분위기 속에서 정약용이 자신의 저술로부터 서학과 관련된 내용
을 나중에 거의 모두 삭제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서양 과학기술에 별로 큰 관심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그는 서양 과학기술 지식을 전체로서 받아들였던 것이 아
니라 그중 자신이 관심이 있는 지식을 단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 조선에서 살았던 정약용 같은 유학자로서는
과학기술을 포함해서 서양 문물의 전반적 우수성을 인정해야 할 필요
가 없었고 서양으로부터 온 모든 것을 받아 들이고 싶어 할 이유가 없
었던 것이다.
또한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정약용의 이해 수준도 높지 않았다 . 그의
서양 과학 지식의 수준은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읽고 그것을 받
아들이는 수준 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 자체에 대한 정약용의 관심이
주로 실용적인 면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다른 학자들에 비교할 때
크지 않았고 그의 과학기술 지식의 수준도 높지 않았는데 서양으로부
터의 과학기술이라고 해서 그의 태도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 또한 위
에서 언급한 기중기, 수차 등 기술에 대한 그의 논의는 청으로부터 우
수한 실용적 기술을 적극 도입하자는 그의 주장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것들이 서양으로부터 온 것인지 원래부터 중국의 것인지가 그
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