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양 과학기술 지식
기독교와 함께 서양의 과학 기술 지식이 17세기부터 한역서들에 담겨
중국으로부터 조선에 들어와서 유통되기 시작했고, 많은 학 자들이 관
심을 가지고 소장하고 읽고 있었다. 특히 서양 천문학은 그것에 바탕
한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중국 전통 역법보
다 더 정확하다고 인정받았기에 어느 정도 정통성까지 갖춘 채 받아들
여져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학자들 중에도 서양 수학과
천문학의 지식을 갖춘 김만중金萬重(1637~1692)·김석문金錫文(1658~1735)
같은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18세기 후반에 들면 서명응徐命膺
(1716~1787)·서호수徐浩修(1736~1799)·이벽·이가환·홍대용·황윤석·홍양
해洪量海(1778)·정철조鄭喆祚(1730~1781) 등이 서양 수학·천문학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공부하여 높은 수준의 지식을 지니고 있
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조선에도 [수리정온數理精
蘊]과 [역상고성曆象考成] 등 최신 천문 역산서를 소장하고 공부한 학자
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한편 이렇듯 서양 수학에 전문적 지식을 갖춘
학자들 이외에 이익李瀷(1681~1763) 같은 사람도 전통 수학에 조예를 가
지고 서양 수학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박지원朴趾源(1737~1805)도 [기하
원본幾何原本]에 나오는 구절을 자신의 글에 이용할 정도로 서양 수학
에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18세기 말쯤이 되면 조선 학계에는 수학에 일정 수준의 실력을 지닌
학자들이 이미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런 가
운데 홍양해―문광도文光道―서호수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서양 수학의
전수관계” 같은 것을 언급할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서양 과학 지식은 국왕과 신하들과의 대화와 토론의 대상이 되기도 했
다. 19세기에 들어서서도 유희柳僖(1773~1837)·홍길주洪吉周(1786~1841) 등
이 서양 수학에 높은 수준의 지식을 지닌 학자들은 이어졌다. 홍석주洪
奭周(1774~1842)가 동생 홍길주를 위해 작성한 독서 목록은 [수리정온]· [역
상고성] 이외에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 [의상고성儀象考成]·
[역산전서曆算全書] 등 18세기에 중국에서 편찬된 천문 역산서를 포함하고 있었
다. 그리고 서호수 가문과 홍석주 가문 사이에서 보듯이 수학을 통한
가문 간의 연결과 상호교류가 나타나기도 했다.
정약용의 시기에는 이런 식으로 서양 과학기술의 지식이 조선 학자
들 사이에 알려진 지 이미 150년이 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당시
조선 학자들 사이에 널리 유통되고 있던 서양 과학 지식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것은 정약용에게 별로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 본 것
처럼 정약용 자신이 젊은 시절 천문·역상·농정·수리 등의 지식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 유행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서학의 책으로부터 그런 지
식을 접하고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형 정
약전이 “일찍이 이벽을 따라 교유하며 ‘역수曆數의 학’을 공 부하고 [기
하원본]을 탐구하여 그 깊은 정수를 밝혔다”는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서 그의 수학修學 과정에 깊은 영향을 미친, 형으로부터 그 같은 지식이
직간접으로 그에게 전달 되었을 것을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정약
용은 서양 과학 기술의 지식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중 일부 내
용을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그는 ‘지구地球’ 관념을 받아들였다 . 지구 관념은 처음에
는 김만중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조선 학자들로
부터 거부 당했었다. 그러나 이익에 의해 받아 들여진 후 지구 관념은
조선 학자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안정복처럼 천주교에 적
대적인 사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며 [동국문헌비고東國文
獻備考]에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
도坤輿萬國全圖] 등 지구설에 바탕한 서양 지도들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들 지도들은 당시 조선에 널리 유통되고 있었고, 정약용 또한 이들 지
도들에 접하고 있었다. 정약용은 “땅의 형세가 둥글고 구형이라는 것
이 분명하고 의심이 없다”고 단언하고 위도에 따라 북극 고도의 차이가
나는 것과 모든 지역에서 오전과 오후 시간이 같은 것을 그 ‘명확한 증
거明驗’로 들었다. 그는 지구 관념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전제인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예컨대 정약전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는
지도 만드는 법에 대해 자세히 논의 하면서 “땅이 둥글다는 ‘바른 리正
理’를 알고 나서야 그 지도가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강물
이 계속해서 흘러 들어가는데도 바다가 넘치지 않는 이유를 묻는 정조
의 질문에 대해 그는 “먼저 지구가 둥글다는 설을 분명히 한 후에야 설
명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이어서 둥근 지구 위에서 바다의 물은 역
시 지구를 둥글게 둘러쌀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같은 설명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그는 [주비산경周髀算經]· [이아爾雅]·
[소문素問] 등에서 지구 관념을 뒷 받침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들을 언
급한 후 “그런 즉 , 땅이 둥글다는 리理는 매우 확실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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