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無相壇의 성립 시말과 무상단 중건파
ㄱ. 서정이 중국에서 초상화와 난서를 구해오다.
無相壇은 언제 성립되었고 언제 해체되었는가?
무상단의 구성원인 徐珽이 중국에서 문창제군과 부우제군의 초상화와 난서들을 구해와 비치하고
고종13년(1876, 丙子)에 『關聖帝君聖蹟圖誌全集』과 『南宮桂籍』을 간행한 한 里社(東關王廟)가 鸞壇道敎를 연구하는 기지라면 鸞書와 鸞壇을 연구한 결과로 한국에 난단을 건설하였을 것이다. 그 한국 최초의 본격적 도교 난단이 무상단이다.
ㄴ. 무상단 직전파
--1872년 불교난단 운동의 경험자인 유운과 최성환이
서정과 만나 도교난단 활동을 전개하다.
유운과 최성환(최황)은
이미 불교난단에서 활동하여 고종 9년(1872,임신)부터 고종 12년(1875, 戊寅)까지 4년 동안 7處에서 단을 개설하고
11번 모여 『觀世音菩薩妙應示現濟衆甘露』를 완성한바 있다.
이런 경험이 풍부한 유운과 최성환이
서정과 만나 도교 난단 무상단을 개설하고 난단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추정된다.
ㄷ. 1877년 무상단의 성림.
無相壇은 고종 14년(1877, 丁丑) 봄에 성립되었다.
徐珽이 간행한 『桂宮誌』 제7권에 「示無相壇弟子」란 시가 있는데 문창제군이 지은 것이다.
중간쯤에 있는 구절을 인용한다.
雲頭鶴輪不暫停
香後鸞筆無少歇
紅牛之年過箕甸
偶逢無心一老翁
緣重義厚暫駐駕
幸得淸虛化眞人
細尋奇緣令扶鸞
漸化成習沈痼人
여기의 紅牛之年이 丁丑年이다. “幸得淸虛”의 청허가 무상단의 영수로 扶鸞 담당자인 청허자 정학구이다.
“雲頭鶴輪不暫停”은 『衆香集』의 문창제군 降序에 있는 “乃下雲頭於無相壇”이란 한 雲頭이다.
위의 詩와 序는 무상단의 형성 초기를 묘사한 것이다.
ㄹ. 무상단 명칭의 최초등장-중향집 서문
무상단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한 문헌은 현재로선 동년 3월 경에 문창제군이 “乃下雲頭於無相壇”이라고 한
『衆香集』의 서문이다.
이해 3월에 쓴 유수원의 발문에서 “南宮聖帝 降鸞於此壇矣”라고 한 남궁성제의 강란이 바로 문창제군의 降序이다.
서난경의 『海東無相壇緣起』에서는 이해 가을에 창건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3월에 쓴 유수원의 발문에서 此壇이라고 한 것이 무상단이니 서난경의 기록이 정확하지 못한 것이다.
이해 겨울에 순양자가 無相壇에 降鸞하여 서문을 쓴 『觀世音菩薩妙應示現濟衆甘露』도 무상단의 존재를 나타내는 비교적 조기 문헌이다. 이해 無相子의 명의로 발문을 써서 간행한 『三聖寶典』도 이 시기 성립된 무상단의 존재를 암시하나 무상단이란 명칭을 명기한 한 것은 아니다.
ㅁ. 무상단 성립 이전의 담연단.
무상단의 핵심 멤버인
유운이 불교 거사로서 불교의 鸞書인 『觀世音菩薩妙應示現濟衆甘露』를 고종 10년(1873, 癸酉)과 11년(1874, 甲戌)에 降受한 湛然壇과 如是觀이 있다. 如是觀은 유운의 별호인데 “如是我聞”이란 불교용어에 도관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단순한 건물 명칭인지 나름대로의 도관의 역할도 한 명칭인지 미상이다.
무상단 이전에 담연단이란 난단도 있는데 이는 불교적 난단인지 본격적 도교의 난단인지 실체를 알 수 없으므로 현재로선 고종 14년(1877, 丁丑)에 성립된 무상단이 한국 최초의 본격적 도교 난단이라고 할 수 있다.
ㅂ. 1883년 서난경이 무상단 중건.-옥황상제 봉안함.
무상단이 성립된 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중단되었다.
서난경은 『海東無相壇緣起』(판심제: 玄化寶鸞)에서 무상단이 무인년(1878, 高宗15) 여름에 中撤되었다가 계미년(1883, 高宗20) 7월 6일에 重整되어 四位天尊과 三聖帝君을 琶谷 無相壇에 봉안하였다고 하였다.
<壇雖中撤 猶無撤也 中撤在戊寅夏 而心中之無相壇固不滅```是壇之重整```癸未七月初六日 辰初一刻立秋吉日良辰 奉安四位天尊三聖帝君于琶谷無相壇(海東無相壇緣起 2a)>
이때 중건된 것이다. 무인년 여름에 무상단이 어떠한 요인으로 철거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무상단 도사들은 변함없이 활발히 난서 출판 활동을 전개하였다.
ㅅ. 난서의 대량 출판.
고종 14년(1877, 丁丑) 12월에 시작되어 15년(1878, 戊寅) 2월에 완성된,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鸞書인 『文昌帝君夢授秘藏經』을 이어 『文昌帝君惺世經』과 『文昌帝君統三經』이 연속 편찬, 간행되었다. 이때에는 무상단 도사들이 모두 道號를 사용하였다.
고종 18년(1881, 辛巳)에 문창제군의 경전 등을 집대성한 총서 『桂宮誌』 9권 7책을 徐珽이 편집하고 李培根이 교정하여 간행하였다. 동년에 서정, 유운이 순양자 여동빈 부우제군에 대한 중국과 한국의 관련 문헌을 집대성하여 『衆香集』이란 총서를 편찬하고 李培根이 교정하여 8권 8책으로 간행하였다.
고종 20년(1883, 癸未)에는 무상단 도사인 張旭이 청나라 朱石君의 『陰騭文註解』를 구해 간행하자 社友인
유운이 발문을 지어 사실을 밝혔다.
이때에는 무상단이 중단 상태이므로 무상단 도사들도 더 이상 도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무상단 乩仙들의 降筆 서발도 없다.
『玄化寶鸞』
유운이 별세한 해인
고종 21년(1884, 甲申) 5월에 무상단이 간행한 『玄化寶鸞』이 무상단이란 명칭이 존재하는 최후의 紀年 문헌이다.
이후는 연대와 명칭이 함께 명기된 문헌이 없다.
그런데 『玄化寶鸞』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무상단과는 내용상 상관이 없는 난서이다.
그러나 이 또한 한국에서 산생된 난서이다.
『玄化寶鸞』 이전은 徐珽이 주역이었는데 이후는 徐蘭瓊이란 인물이 主役이 된다.
ㅇ. 개화단에 서난경이 참여 하다.
『玄化寶鸞』의 권수제는 雲中 徐蘭瓊 承宣, 道明 朴晉陽 奉彙, 繪峯 金泰冕 奉校이다.
권수제 옆 첫 부분을 보면 壬午(1882, 高宗19)春에 淸恩 趙錫麟의 開化壇에서 四十七日醮를 개설한 사실을 기록하고
和開化壇韻, 次遊樂道園韻, 次忠孝社韻이라는 시등을 기재하였다.
개화단을 운영하는 결사가 忠孝社이고 그 壇社가 있는 장소가 樂道園이었다.
次遊樂道園韻의 關羽의 시에서 “幾遍駐鑾游白岳”이라 한 것으로 보아 개화단이 있던 장소는 서울시 종로구 백악산 일원의 동네였다.
ㅈ. 개화단은 옥황상제 신앙 중심.
和開化壇韻의 玉製 시에서 “雲中駐蹕對雲中”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운중 서난경이 개화단의 중요 인물이었다.
그 시의 끝에서 “予送三君開化任, 善爲開化代予功”이라 한 삼군은 관우(관성제군), 장아(문창제군), 여암(부우제군) 삼성 제군을 가리킨다. 이 시를 지은 존재는 옥황상제이니 개화단은 삼성 제군 신앙에 옥황상제 신앙이 가미된 것이다.
無相壇은 삼성 제군 신앙의 난단이고, 개화단은 옥황상제 중심에 삼성 제군과 기타 신명이 혼합된 난단으로 별개의 난단이었다. 개화단의 난서를 무상단에서 간행하였다.
ㅊ. 조광단과 광삼단.
『玄化寶鸞』에는 開化壇말고도 照廣壇과 光三壇의 두 난단 활동이 더 기재되어 있다.
『玄化寶鸞』은 이런 난단 활동의 종합 기록인 것이다.
ㅋ. 1883년 조광단의 이진순.-성계집의 기록
고종 20년(1883, 癸未) 여름에 英才 李瑨淳의 照廣壇에 기도하자 關帝가 明諭하였다.
이진순은 고종 대에 한성부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서 삼성제군이 내린 乩示를 日錄의 방식으로 기록한 책자인 『聖乩集』에 등장한다.
경진년(1880, 高宗17)에 관성제군이 李瑨淳家에 복을 내린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진순은 본디 관제 신앙인이었다.
조광단의 핵심인물- 이진순, 전성찬, 서난경
조광단의 멤버 도사는 李瑨淳 외에 全聖暢과 徐蘭瓊 3인이 핵심인 듯하다.
관제는 전성창에게 백행의 근본이라는 효에 대해 百神의 제일 尊敬地라고 비유하였다.
같은 侍壇 곧 守壇 道士인 전성창, 이진순 외에 한 명 더 거론하며 三人에 대해 三聖의 경전인 『음즐문』, 『각세경』, 『구심편』 등을 多讀하라고 申諭하였다. 『음즐문』은 문창제군, 『각세경』은 관성제군, 『구심편』은 부우제군의 대표적 난서이다. 三人 중 한 명이 나중에 이 뒤에 생일을 축하받는 서난경일 것이다. 서난경의 생년은 언급이 없으나 생일은 6월 5일이다.
<癸未夏禱于英才李瑨淳之照廣壇 關帝明諭(玄化寶鸞 18a) >
關帝單諭全聖暢 君之意可尙 夫孝者 百神之第一尊敬地 非孝其餘無足觀(玄化寶鸞 30b)
明諭李瑨淳 君言可謂推己及人 同是人也 同是侍壇(玄化寶鸞 31a)
趙累白 余每觀守壇道士睡昏昏不省之容 悶悶不堪~~~都出於無誠怠慢 愼之愼之 更勿此爲也(玄化寶鸞 49a)
敦諭三人```陰騭文覺世經外 多讀求心篇 及昨下諸經訓之意 申諭三人焉(玄化寶鸞 31a)
伏魔明諭 明日卽六月初五日 徐雲中之弦弧日也 予與二帝 及兄王昭烈帝 及軍師桓侯 皆賜一詩(玄化寶鸞 47a)
조광단의 양대 핵심 도사- 이진순, 서난경
나중에는 이진순과 서난경이 照廣壇의 양대 핵심 도사로 활동한 듯하다. 武侯(제갈량)가 금세의 修道者로 중국은 월등한 사람이 5명인데 동국은 2명뿐이라고 하며 照廣壇의 醮禱를 가상히 여기는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武侯明告```今世修道之人 中國有超等者五人 東土只有二人 而今此照廣壇醮禱 眞可尙也(玄化寶鸞 45b)
1883년 광삼단을 서난경이 독자적으로 열다
서난경은 독자적으로 광삼단 도사였다.
照廣壇과 같은 시기인 고종 20년(1883, 癸未) 남지월(11월) 1일에 玉皇上帝가 서난경의 光三壇에 降鸞하였다.
처음에는 옥황상제가 仙槎의 九龍山에 있는 서난경의 修道寧靜樓에 降鸞하였다.
서난경이 三角巾을 쓰고 六稜衣를 입고 분향한 채 『周易』을 읽자 참으로 上等 有道之士라고 인정받아 三敎之師로 허락받아 창생으로 하여금 向善 免劫의 開化를 달성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癸未南至月朔 降于雲中徐蘭瓊之光三壇(玄化寶鸞 50a)
玉帝降示 予與諸聖群仙 乘雲駕鶴 初下仙槎九龍山之陽 徐雲中蘭瓊修道寧靜樓(玄化寶鸞 50b)
中有一道士 頭戴三角巾 身被六稜衣 焚香觀易 眞上等有道之士 予許爾三敎之師 須戰兢戒惕 俾蒼生向善免劫也(玄化寶鸞 50b)
서난경의 신앙 이력:
울진에서 옥황상제신앙-개화단 참여-조광단 참여-독자적으로 광삼단 개설.
仙槎는 울진군의 옛지명이다.
옥황상제의 묘사에서 滄海如藍, 疊嶂若筍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동해안 울진군이 맞다고 하겠다.
구룡산은 해안가의 산이다. 서난경이 『奇靈玄妙經』의 발문에서 九龍灣一竿客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구룡산과 구룡만은 동일 지역일 것이다.
울진군의 수도영정루에서 玉皇上帝를 모시는 난단 활동을 하던 서난경이
서울 등지로 이주하여
조석린의 開化壇에서 활동하고
이어서 이진순의 照廣壇에서 활동하다가
독자적으로 光三壇을 개설하여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1883년 서난경이 무상단을 중건하다.
곧바로 무인년(1878, 高宗15) 가을에 중단된 無相壇을 계미년(1883, 高宗20) 7월에 중건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서난경은 『海東無相壇緣起』(판심제: 玄化寶鸞)에서 무상단이 무인년(1878, 高宗15) 여름에 중단되었다가 계미년(1883, 高宗20) 7월 8일에 중건되었다고 하였다.
신앙의 대상을 옥황신앙으로 확대하다.
중건된 뒤 무상단의 신앙 대상이 변모되어 삼성 신앙에서 옥황신앙으로 확대되었다.
서난경의 신앙 취향대로 무상단에 四位天尊의 위패와 三聖帝君의 초상을 모셨다.
四位天尊은
玉皇大天尊玄穹高上帝-옥황상제
尋聲赴感太乙救苦天尊-태을구고천존
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
玉虛師相玄天上帝金闕化身天尊-현천상제
이고
三聖帝君의 칭호는
九天輔元開化主宰七曲靈應文昌天尊-문창제군
三界伏魔大帝神威遠鎭天尊關聖帝君-관성제군
玉淸內相金闕選仙純陽祖師孚佑帝君-부우제군(여동빈)
이다. 이들을 모시고 매일 조찬과 석참 예배를 드렸다.
개화기에 난단도사들은 도교적 개화를 꿈꾸다.
이때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1년 전이었다.
김옥균 등 우국지사들은 신문명, 신제도를 받아들이는 開化를 이루기 위하여 목숨을 건 개혁을 도모하는 시대에
난단도사들은 권선징악적 난서의 교화가 펴진 도교적 개화를 꿈꾸었으니 시대적 소명의식이 다르다고 하겠다.
무상단 중건파의 신앙대상
여러 鸞壇에서 활동하던 도사인 徐蘭瓊이 본래 옥황신앙의 소유자라서 無相壇을 중건하여 활동한 뒤로
무상단은 관성, 문창, 부우 제군을 숭배하는 三聖 信仰에서
삼성은 물론 玉皇上帝를 중심으로
공자, 노자 등 잡다한 仙人, 聖人을 숭배하는 玉皇 信仰으로 다변화되었으니 변모된 것이다.
이를 이전의 무상단과 달리 보아 無相壇 重建派라고 별칭하여 연구의 편의를 도모한다.
무상단 중건파의 난서 출판.
無相壇 重建派도 이전의 무상단 못지 않게 활발한 난서 출판 활동을 벌여 중건 이듬해인
고종 21년(1884, 甲申)에
『玄化寶鸞』(雲中 徐蘭瓊 承宣, 道明 朴晉陽 奉彙, 繪峯 金泰冕 奉校, 刊記: 光緖十年仲夏 無相壇敬繡)과
『關聖帝君開化大程全集』(徐蘭瓊 承宣, 趙錫麟 奉輯)을 편찬, 간행하고 이어
연대 미상으로
『敬善經十二大藏』(侍壇弟子 雲道 宋錫祜 承宣, 雲中 徐蘭瓊 隸字解義),
『奇靈玄妙經』(無相壇侍士? 徐蘭瓊 承宣, 朴龍吉, 朴維臣 간, 孫德洪 跋, “爲妙虛子一贊”, 文洪錫-海東一小民 跋, 九龍灣一竿客 雲中 徐蘭瓊 跋),
『海東無相壇緣起』(판심제: 玄化寶鸞),
『新訂演經篇』(徐蘭瓊 跋, 刊記: 岑城 金世澤 刊行) 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무상단 중건파의 해체시기.
이 무상단 중건파의 해체 시기는 미상이다.
중건 이듬해인 고종 21년(1884, 甲申) 이후 더 이상의 기명이 존재하지 않으니 추적이 불가능하나 몇 년 더 활동하다가 자연스럽게 해체된 것으로 보여진다. 갑오개혁(1894, 高宗31) 무렵에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