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에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연합해서 '신간회'를
결성하자 아나키스트들은 심하게 반발했다. 아나키스트들은, 국
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을 뿐 아니라 사회 진화론을 수용해 계급
불평등(양반, 평민, 상놈)을 인정하고 노동자, 농민 운동의 성장
을 가로막던 민족주의자들과 타협할 수 없었다. 아나키스트들은
그들과 타협한 공산주의자들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1927년 12월
에 아나키스트들이 결성한 '관서흑우회'는 "적색 개량주의 일
파, 즉 공산주의자들에게 농락당하는 대중을 바른 길로 구축하
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분명하게 규정했다. 그리고 "현재의 국
가 제도를 폐지하고 코뮌을 기초로 한 자유 연합적 사회 제도를
건설할 것, 현재의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지방 분산적 산업
조직으로 개혁할 것, 현재의 계급,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고 전
인류의 자유, 평등, 우애의 사회를 건설할 것"을 결의했다.
1928년 1월 15일에 결성된 '흑우연맹'도 신간회를 "인류의 적"
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4년 10월 24일자 <흑색신문>에서 금월今月은 "지식 계급은
민중에게 자본론과 레닌의 교리를 강제하며 그 교리 앞에 민상
의 정당한 요구를 교묘히 말살시키고 자가自家의 지배권을 확립
하려고 한다"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
악한 러시아의 실정을 파악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에 대
한 반대의 차원을 넘어 공산주의자들을 "씨도 없이 모조리 박멸
해야"할 타도의 대상으로, 인류의 적으로 규정했다.
신간회와의 대립만이 아니라 소위 '아나- 볼 논쟁'이라 불린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의 논쟁도 진행되었다. 1925년에 '조선프
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이 결성되면서 공산주의 계열 문인
들이 조선 문단을 장악하고 계급 이론에 바탕을 둔 문예 이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윤기정은 "혁명 전기에 있어 프롤레타리아 문
예 운동은 혁명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거기에 만족한다.
투쟁기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문예의 본질이란 선전과 선동의 임
무를 다하면 그만이다"라고 주장하며 예술이 혁명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화산, 권구현 등
의 아나키즘 계열 문인들이 이를 반박하면서 1927년 봄부터 가
을에 걸쳐 '아나 -볼 논쟁'이 벌어졌다. 김화산 등은 선전 수단
으로서의 계급 문학의 가치를 인정한 동시에 예술적인 욕구의
자율성 또한 인정했다. 하지만 볼셰비키 문인들은 계급해방 운
동의 일익을 담당하지 못하는 예술의 가치를 부정하고 아나키스
트 문인들을 좌익 문예가의 가면을 쓴 부르주아 문인이라고 비
판했다. 이에 아나키스트들은 볼셰비키 문인들이 예술을 정치의
도구로 만들었다고 반박했다.
이런 논쟁을 거치면서 한국에서도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는 화
해할 수 없는 적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국내의 사회주의 운동은
이미 국가를 수립한 러시아로 부터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반면에 국가 없는 사회를 꿈꿨던 아나키스트들은 소
규모 공동체를 만드는 실험을 국외에서 진행했다. 1929년에 김
좌진 등이 주도한 한족총연합회가 대표적인 예이다.
해방 후에도 아나키스트들이 독립노농당을 결성하는 등 정치
현실에 개입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를 벌였지만 군사 쿠데타와 군
사 독재는 그런 시도를 가로막았다. 독재 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아나키즘은 논쟁의 화두로 떠오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