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편「중국」 덩샤오핑15 - 모택동의 중앙집권적 모순론과 등소평의 개혁개방 노선추구
일체를 군중과 연결시키고 군중 가운데서 나와 군중 속으로 들어가라
모택동이 주장했던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지고 있는 모순론은 이론적으로는 팔딱팔딱 뛰는 살아 있는 생선처럼 신선했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모순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계급적 모순을 간결하게 설명하면서 호응을 얻어냈다. 즉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노동자들은 피지배자들이 주체가 되어 지배계급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단순한 모택동의 주장에 매료되어 희망을 갖게 되었다. 둘째는 자본문명을 이룩하고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만든 거대 제국주의 예를 들었다. 즉 제국주의로부터 국가를 빼앗긴 제 3세계 국가 간의 모순을 들었다. 이것은 힘 있는 국가가 강제적으로 타 국가를 빼았는 것이고, 침탈당한 국가는 물리적 투쟁으로 국가를 재탈환 할 수 있다는 간단한 설명이었다. 모택동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 그 자체가 모순 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저급한 주장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주장의 한계는 모택동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국가건설에서 잘 드러난다.
군중이란 순박하면서도 때로는 무지하다.
모택동은 위 두 번째 논리를 주장하면서 사실은 자체적인 모순에 빠진 것이다. 제국주의가 힘없는 국가를 빼앗을 수 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은 모택동의 야욕을 드러낸 단순한 구조의 민중 사기극이다. 이 말 뜻에는 모택동과 제국주의가 동일하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무지한 민중들은 이 속 뜻을 알 리가 없었다. 더불어 모택동은 교묘하게 ‘침탈당한 국가의 물리적 투쟁’을 설명하면서 투쟁의 선봉에 민중을 앞세웠지만 자신의 교조주의에 대한 민중투쟁은 가차 없이 응징해서 재탈환 하겠다는 이중적인 ‘마오이즘’의 속내를 감추고 있다.
▲ 논문 전문(좌)과 모택동 (우)
모택동 자신도 초기 1957년 2월 “인민내부 모순문제의 정확한 처리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밝힌 바 있지만, 이러한 자체 모순 해결점을 다음과 같이 미꾸라지 전법으로 해결코자 했다.
모택동은 이 논리를 설명하면서 투쟁할 때 발생되는 모순점은 양 관계의 모순점에 대한 비판에서 자아비판을 통한 군중들의 단결된 교육으로 해결된다고 설명했다. 즉 모순을 모순으로 해결한다는 방식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쉽게 설명하자면, 사회주의 국가에서 발생하는 경제 생산력을 놓고 볼 때, 일정한 생산 출하량의 배당을 받아서 그 목표를 완수하지 못한 책임자는 군중 앞에서 스스로 자아비판을 강요당해야만 했다.
▲ 반우파운동 당시에 농공민주당 지도자 장보진이 민중들로부터 공개비판을 당하는 장면
이 자아비판을 통해서 군중들은 야유를 보냈고, 이러한 광장 앞의 단결된 풍경이 교육적 방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사실 이러한 방식은 소련 종주국을 필두로 중국이 차용하였고 현재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3대 세습체제를 단행하고 있는 북한이 중국을 모방한 것이다. 이러한 초기부터 사용된 자아비판이 지금은 일률적이고 규칙적인 공산주의 법을 차용하여 공개처형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얼마나 모순된 행위인가. 민중들에게 처형의 규칙을 묻고자 실행된 평등사상의 논리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 결국은 그들의 부정했던 자본주의 책임과 의무를 묻기 위한 조직체계를 그대로 따른 다는 것이다. 결국 평등실현을 위해서는 민중은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결국 민중이 요구한 바를 공산주의 법이라는 울타리를 도용하여 처형을 판단하는 주체로 삼는다. 하지만 이 또한 해답은 아니다. 민중처단의 주체가 바로 사회주의 조직체계를 구성하는 통제집단인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주장하는 ‘평등사상’은 존재하는가?
▲ 1958년 6월 8일 모택동 지시에 의한 공산당의 '반우파 투쟁
사회주의 평등사상을 부르짖으면서, 전면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그 정책을 민중들에게 전달하는 문제 해결자들이 누구였는가? 그들이 바로 평등을 주장하기 위해서 또 다른 불평등한 조직체계를 만든 공산당 당원의 핵심요원들이다. 사회주의 모순론이란 계급 없는 사회를 구축한다는 ‘평등사상’에서 출발점이 잘못된 것이다.
그들의 논리는 힘없는 다수가 힘 있는 소수의 권력자에게 억압받지 말자는 뜻으로 출발했다.
이것이 계급투쟁론의 출발점이다. 둘째 억압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강력하게 투쟁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것이 무장투쟁론의 출발점이다. 셋째 이 투쟁의 전개방법에는 모든 물리적인 파괴행위와 전쟁, 살상행위가 뒤 따른다. 이것이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초급단계이다. 넷째 이러한 계급투쟁의 단계를 거쳐서 다수의 민중이 주체가 되는 ‘평등세상’을 만든다는 것이 사회주의 저변 논리이다. 이것이 모든 인민들이 지상낙원을 구현하고 평등화된 사회를 만든다는 소위 사회주의 ‘대동사상과 평등사상’이다.
사회주의 평등사상은 존재할 수 없고 그 자체가 모순론이다.
사회주의 모순론은 결국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서 또 다른 계급체계를 형성하면서 본질적인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 논리에 대한 민중의 항거를 위해 또 다른 폭력수단을 자행하는 것이 사회주의 정치학적 결정적인 모순이다. 평등사회를 구현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인민들이 평등하게 부를 축적하고 질적인 삶을 도모한다는 사회주의 경제적 접근 방식이다. 그러나 이 또한 정책적 결정은 핵심 공당산원들의 의사결정 방식일 뿐이다. 경제정책의 실패에 대한 변수는 또 다른 인민폭등의 견제를 위해 폭력과 살상으로 나타났고 그들은 견고하게 조직을 재구축해 나가는 하나의 수단으로 삼을 뿐이다. 즉 모든 민중은 사회주의 지도자를 위한 하나의 이론적 희생양일 뿐이다. 그들 사회주의 세상의 모든 민중은 결국 지상낙원이 아닌 헐벗고 굶주리는 실패한 인간세상의 거지집단일 뿐이요. 통제된 집단의 논리적 노예일 뿐이다.
중국식 사회주의를 견지하면서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라.
중국은 1976년 모택동의 사망으로 촉발된 경제실패의 후유증 여파로 전면적인 등소평 실용주의 경제정책 노선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미 1978년 2월 중국 현대화에 필요한 경제발전 10개년계획을 채택한 등소평은 그를 따르던 호요방(胡耀邦;후야오방)에게 국내의 실무를 맡기고 있었다.
이제 등소평은 중국의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자신의 실용주의 노선을 현대화 계획과 함께 드넓은 중국 땅에 뿌리 내리려 한다. 먼저 그 기초 작업을 선행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 일차적인 방법이 레닌- 마르크스 논리에서 모택동 논리로 교조• 신격화된 인민들의 정신을 자각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가능한 모택동의 실천검증 사상의 뿌리는 유지하되 교조• 신격화된 잘못된 사상을 근본적으로 바꿔 인민들을 재인식•재학습 시키지 않는다면 중국은 전 세계의 지도에서 사라질 운명을 예감한 것이다. 자신이 평생을 사회주의 이념에 몸 바쳐 추구했던 확고한 신념인 인민을 위한 국가를 만든다는 처절한 개인적인 투쟁사도 물론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모택동의 정책 실패로 5,0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고, 문화대혁명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희생 되었다. 이런 저런 죄명과 함께 처벌 된 사람만 2백 만 명을 넘어선 현실은 등소평으로 하여금 이제껏 실패한 정책의 검증을 위한 새로운 대안책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이제 등소평은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국가건설의 토대를 위해서 과거의 낡은 교조주의 폐단에서 비롯된 실패를 청산하고 민중을 위한 국가건설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의 심복인 호유방에게 국내문제를 맡긴다.
▲ 1984년 5월 10일 연변을 시찰 중인 등소평의 심복 호요방(우측)
1978년 5월에 중앙당의 간부들에게 회람되는 내부문건에 자신의 심복이면서 자신이 당조직부장으로 발탁한 호요방胡耀邦으로 하여금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라는 글을 집필해 발표하도록 했다. 이 글은 교조주의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었으며, 간접적으로는 모택동의 후계자 화국봉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등소평은 이제 개혁개방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외국 순방길에 올라 성공한 사례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 밀알가입은 hmwiwon@gmail.com (개인신상은 철저히 보호됩니다)
※ 군자금계좌 : 국민은행 474901-04-153920 성사재인(김갑수)
※ 통합경전계좌 : 국민은행 901-6767-9263노영균sjm550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