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첫번째로 가섭이 맨 먼저 등불을 전하니
이십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
제일가섭이 수전등하니 이십팔대는 서천기로다
第一迦葉 首傳燈 二十八代 西天記
첫째로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등불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등불이란 밤길 갈 때 밝히는 불이 아니라 '마음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중생이란 번뇌망상에 덮혀서 마음 등불의 빛이 밖으로 나갈 수 없으므로 캄캄하여 자기 눈으로도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 번뇌망상을 다 없애 버리고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까지 뿌리 뽑아 버릴 것 같으면 자성의 등불이 켜져서 자성의 광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이것이 실지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것[以心傳心]'이며 '부처님 마음을 깨치는 종[悟佛心宗]'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의 등불을 부처님으로부터 누가 제일 먼저 받았느냐 하면, 가섭존자가 부처님 근본법을 바로 깨쳐서 마음의 등불을 전해 받았고, 그 이후로 서천(西天) 인도에서 이십팔대를 이어 전해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등(傳燈), 등불을 전했다고 하고 그 전한 기록을 [전등록(傳燈錄)]이라 합니다.
87.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보리달마가 첫 조사가 되었도다
법동류입차토하여는 보리달마위초조로다
法東流入此土 菩提達磨爲初祖
인도에서는 가섭존자가 처음 법을 받아 이십팔대를 내려왔는데 중국에 와서는 보리달마가 처음으로 이 법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보리달마가 자기의 인연이 중국에 있을 알게 되고 스승인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도 동토에 가서 대법을 전하라는 수기를 주었습니다. 그렇게해서 달마스님이 처음으로 중국에 와서 선(禪)의 정법을 전한 첫 조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88. 육대로 옷 전한 일 천하에 소문났고
뒷 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랴
육대전의는 천하문이라 후인득도하궁수아
六代傳衣 天下聞 後人得道何窮數
'육대동안 옷을 전했다'고 하는 것은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갖고 온 가사를 말하는데, 그동안에는 세상사람들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 것'만으로서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하여 이십팔대로 전해 내려온 법의 표시인 가사(袈裟)를 중국에서 와서 육대동안을 전한 것을 천하가 다 안다는 것입니다.
육조스님 이후로는 모든 믿음이 다 갖추어진 만큼 옷을 전할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그 뒤부터는 가사를 전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옷을 전해 받지 못한 뒷사람들은 도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육조스님께서 이제 선(禪)에 대한 믿음이 천하에 바로 섰기 때문에 옷을 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옷을 전하지 않은 것이지, 도를 바로 깨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옷을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흔히 잘 모르는 사람들은, '육조대사가 옷을 전하지 않은 것은 옷을 전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전하지 아니했다'고 크게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은 육조대사 이후로 무애자재한 대도를 성취한 대조사들이 많다는 것을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가스님이 '뒷 사람들도 도를 얻은 사람이 한량없이 많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등록]에 드러난 사람들도 많지만 그 뿐만 아니라 남들이 알지 못하는 숨은 도인들이 더 많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전등록]에 드러난 사람과 드러나지 않은 사람을 다 친다면 한량이 없을 것입니다. [전등록] 등에 바로 깨치지 못한 사람들도 기록된 경우가 있는데 혹 편집한 사람들의 잘못일 수 있기 때문에 [전등록] 등에만 표준삼을 수는 없지만,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내려 오면서 육조대사와 다름없는 대조사들이 무한으로 많이 있습니다.
육조스님이 옷을 전하지 아니했다고 해서 도를 깨친 사람이 없어서 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시의 영가스님의 말씀에서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89.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고 공하도다
진불립망본공이여 유무구견불공공이라
眞不立妄本空 有無俱遣不空空
진(眞)과 망(妄)은 상대법, 변견이기 때문에 둘 다 버려야 합니다. 있음과 없음을 다 버려서 진(眞)도 서지 못하고 망(妄)도 본래 공해서 진(眞)과 망(妄)이 다 없어지니 공하고 공한 것도 아니다는 말입니다.
참됨과 망이 다 서지 못하고, 있음과 없음을 다 버려서 공한 것 뿐이라면 공하고 공한 것[空空]뿐으로서 공공적적(空空寂寂)한 것만이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공공적적한 여기에 머물 것 같으면 단공(斷空)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고 나니 공하고 공함도 아니다'고 한 것이니, 이곳이 참으로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난 곳'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버린다'고 함은 쌍차를, '공하지 않고 공하도다'는 것은 쌍조를 표현한 것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하지 않고 공함이냐?
90. 이십공문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도다
이십공문에 원불착하니 일성여래체자동이로다
二十空門 元不著 一性如來體自同
이십 공문에 참으로 집착하지 아니하니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이 한 성품 즉 자성(自性)을 깨쳐서 모두 성불하고 삼매를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자성 내놓고 여래가 따로 없고 중도가 따로 없으며 구경각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空),여래(如來),불(佛),조사(祖師),열반(涅槃) 등의 수천 수만 가지 이름으로 어떠한 표현을 하든지간에 그것은 '한 가지 성품'으로서 자성 하나로 모두가 일관되고 있어서 본체가 꼭 같다는 말입니다. 중생도 같고 외도도 같고 마구니도 같아서 '한가지 성 품'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 이것을 바로 알아서 쓰느냐 못쓰느냐 하는 것일 뿐, 근본 자성 자체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바로 개척해서 수용하는 사람은 부사의 해탈경계에서 무애자재하게 놀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을 매(昧)해서 잘 활용하지 못하면 중생이며 외도며 마구니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