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실록》 1597년 7월 22일 ※
“7월 15일 저녁 10시에 왜선 5~6척이 갑자기 소동을 일으키며 불을질러 우리나라 전함 4척이 전부 타버렸고, 우리 여러 장수들은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몰라하며 진을 벌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닭이 울 무렵, 왜선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타나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 근처에 가득 널린 채 싸우거니 물러나거니 하였는데, 도저히 적들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에 우리 군사들이 고성땅 춘원포로 물러나 진을 쳤으나 적세가 하늘을 찔러 우리 배들이 전부 불타고 깨어지고, 장수와 병졸들도 모두 불에타서 죽고, 빠져 죽을 때에, 신은 통제사 원균, 순천부사 우치적과 함께 빠져나와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원균은 늙어서 달아나지 못하고 혼자 칼을 집고 외로이 소나무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다가 돌아보았더니 왜놈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면서 원균이 있는 곳에 이르렀는데, 원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경상우수사 배설과 옥포 · 안골포 만호 등이 겨우 몸을 보전하였고, 모든 배들의 불타는 연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왜적들이 무수히 한산도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전관 김식이 조정에 보고한 칠천량해전 상황을 기록한 장계 내용이다. 김식은 원균의 기함에 타고 부산포 공격을 계속 독촉했던 것 같다. 밤 10시에 왜선들이 와서 불을 질렀다면 조선 함대의 정박지는 이미 들통나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왜군 특공선단이 몇척의 병선에 불을 질렀고 이를 신호탄으로 이튿날 새벽 영등포 · 장문포 · 가덕도 · 웅천포 · 안골포 · 김해 등지에서 작전 대기중이던 왜선단이 바다를 뒤덮듯이 몰려들었다.
조선 함대는 왜군들의 방화가 있은 직후 즉시 함대를 한산도로 물려서 왜군들의 공격에 대비했어야 했다. 그러나 선전관이 기함에 타고 앉아 어명을 들먹이며 한산도로의 퇴각을 막았는지, 아니면 원균이 그날 저녁에도 술을 마시고 취해 있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칠천량에 눌러 있다가 당한 참변이다.
김식의 장계를 받아본 선조는 할 말을 잊은 채 별전에서 대신들과 비변사, 당상관들을 불러 모아 시국 수습에 대한 긴급 어전회의를 열었다.
※ 《선조실록》 ※
선조 : (김식의 장계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수군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으니(궤멸당하였으니) 이제는 어찌할 길이 없다. 대신들이 마땅히 명나라 도독과 안찰의 아문으로 가서 이것을 보고해야 할 것이다.
글쎄 원, 충청도나 전라도 등지에는 혹시 남은 배가 있는지! 어찌 이 사태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나. 이제라도 남은 배들을 거두어서 수비할 계책을 세우는 것이 옳지.
(좌우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갔다.)
선조 : (목소리를 높여서) 그래, 대신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이대로 두고 그저 아무 것도 아니할 셈인가! 그래, 아무 대답도 아니 하면 왜적이 저절로 물러가고 나랏일도 잘 되어갈 거란 말인가!
모두들 할 말이 없었다.
특히 그동안 원균을 두둔했던 대신들은 책임 추궁이 두려워서 자라목이 되어 있었다.
※ 《선조실록》 ※
유성룡(영의정) : 감히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도 답답해서 당장 무슨 좋은 계책이 생각나는 게 없으므로 미처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조 :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다는 것은 천운(天運)이니까 어찌할 수가 없어! 원균은 죽었을망정 어찌 달리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겠나. 그저 각 도의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할 뿐이야. 원균은 척후선도 배치하지 않았던가? 왜 한산도로 물러나서 지키지 않았을까?
선조는 패전의 결과를 하늘의 뜻으로 돌리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책임회피였고, 그 덕에 윤두수, 윤근수, 김응남 등 원균을 두둔했던 사람들이 책임추궁을 면하게 되었다.
선조는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한다’ 고 했지만, 그러고 싶어도 그럴 병력은 이미 모두 다 사라지고 난 후였다.
※ 《선조실록》 ※
유성룡 : 거의 한산에 가까이 오다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밤 9시쯤 적이 어둠을 타고 몰래 들어와서 갑자기 총포를 쏘고 우리 전함 4척에 불을 질렀습니다.
어리둥절한 중에 따라가 잡지 못했으며, 그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적들이 사면을 에워쌌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해서 상륙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이 먼저 올라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손을 쓸 도리도 없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왜군 측은 수륙군 합동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공격전을 펼쳤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던 선조는 원균이 부산포 쪽으로 나가기만 하면 고니시의 도움을 받아 가토를 잡을 수 있을 줄로 알았다. 그래서 선전관을 원균의 기함에 동승하게 해서 부산 출동을 어명으로 강요했던 것이다.
※ 《선조실록》 ※
선조 : 한산도를 굳게 수비해서 범이 숲 속에 든 형세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너무 명령을 독촉해서 이 같이 패전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늘이 한 일이다. 이제 와서 말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나 어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야 있겠는가? 당연히 남은 배들을 수습해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수비토록 해야 할 것이다.
‘한산도(견내량) 봉쇄작전’ 은 이순신의 지론인데, 언제부터인지 원균이 인용하더니, 이제 와서 선조가 이를 이용 하고 있다.
※ 《선조실록》 ※
이항복(병조판서) : 지금 할 일이라고는 통제사와 수사를 속히 임명하고 그들을 시켜서 계획을 세우고 방비를 하도록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순신의 복권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