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크게 베푸는 문을 여니 옹색함이 없도다
묵시설설시묵이여 대시문개무옹색이로다
默時說說時默 大施門開無壅塞
'취할래야 취할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서 이렇게 한다'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 설(說)과 묵(默), 묵이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을 때로서 아주 적적(寂寂)한 것을 말하며, 설이란 이야기할 때로써 아주 시끄러운 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 묵이란 차(遮)를 말하고 설이란 조(照)를 말합니다. 거기에서는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묵묵할 때 말하고 말할 때 묵묵하다'는 것으로써, 묵이 곧 설이고 설이 곧 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쌍차(雙遮)하여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한다'는 것이 될 것 같으면 설과 묵이 원융하여 무애자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할 때가 가만히 있을 때이고 가만히 있을 때가 말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적적한 가운데 광명이 있고 광명이 있는 가운데 적적함이 있어서 말과 묵이 완전히 통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는 것과 같이, 움직임 가운데 머물음이 있고 머무는 가운데 움직임이 있어서 움직임이 머물음이고 머물음이 움직임이며 진(眞)이 곧 가(假)요 가(假)가 곧 진(眞)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양변이 원융무애하고 융통자재한 것을 표현하여 '묵묵할 때 말하고 말할 때 묵묵하다'고 한 것이니, 이것은 전체에 다 통하는 것입니다.
'크게 베푸는 문을 열어 옹색함이 없다'는 것은 일체가 서로 다 원융하게 통해서 무애자재하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자재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와서는 묵과 설이 통하는 동시에 선과 악이 통하고 마구니와 부처가 통합니다. 생멸이 완전히 끊어진 부사의해탈경계에서 진여대용이 현전한 것을 보게 되면 모든 것이 융통자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곧 사사무애(事事無碍)이며 이사무애(理事無碍)입니다.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 없다'한 이 자체를 분명히 알 것 같으면 모든 것이 융통자재해서 하나도 거리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애자재한 쌍차쌍조한 이것을 무엇이라 해야 되겠느냐?
82. 누가 나에게 무슨 종취를 아느냐고 물으면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대답해 주어라
유인이 문아해하종커던 보도마하반야력하라
有人 問我解何宗 報道摩 般若力
'어떤 사람이 나에게 종취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마하반야의 힘을 바로 아는 사람이라고 대답해 주어라'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는 대지혜이니 대지혜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말합니다. 일체종지는 구경각을 성취함을 말하며 반야(般若)란 중도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경법을 성취해서 일체에 조금도 걸림이 없고 구애됨이 없는 자재를 얻는 것은 곧 마하반야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83.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이 알지 못하고
역행,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한다
혹시혹비인불식이요 역행순행천막측이로다
或是或非人不識 逆行順行天莫測
'혹은 옳기도 하고 혹은 그르기도 함을 사람이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상(我相)도 인상(人相)도 다 떨어졌기 때문이니, '혹은 옳고 혹은 그르다'고 하여 무슨 옳고 그름[是非]을 말하는 줄 알아서는 큰 오해입니다. 여기서는 옳음과 그름이 끊어져서 쌍차한 곳에서 참으로 쌍조가 되어 옳음과 그름이 무애 자재하다는 것입니다. 옳다해도 좋고 그르다 해도 좋고 옳음이 곧 그름이요 그름이 곧 옮음으로써 무애자재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 수 없는 가운데 혹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는 것입 니다.
'혹은 옳고 혹은 그르다'라는 것은 쌍조를 먼저 말해놓고 '사람이 알지 못하다'함은 쌍차를 말한 것으로써 조이차(照而遮)하여 원융무애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역(逆)과 순(順)이란 정반대인데 '역행을 하든지 순행을 하든지 하늘도 모른다'하는 것은 부처도 모르고 조사도 모르는 것인데 하늘인들 알 수 있으며 사람인들 알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역행을 하던지 순행을 하던지 혹을 옳다든지 그르다든지간에 이것은 단순히 옳음과 그름, 역과 순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완전히 여읜 중도정견으로 쌍조한데서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마구니와 부처까지도 떨어져서 인간도 알 수 없고 하늘도 알 수 없어서 누가 안다고 하면 거짓말이라하는 것입니다. 일체 알 수 없고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서 역행도 할 수 있고 순행도 할 수 있으며 옳음도 할 수 있고 그름도 할 수 있어서 내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영원토록 부사의해탈경계에서 열반로를 걷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애자재하고 호호탕탕한 대해탈경계는 어떻게 해서 얻었느냐?
84. 나는 일찌기 많은 겁 지나며 수행하였으니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함이 아니로다
오조증경다겁수라 불시등한상광혹이로다
吾早曾經多劫修 不是等閑相 惑
나는 저 과거 진묵겁전(塵墨劫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많은 세월동안 정법을 믿고 무한한 노력을 해서 이 법을 성취한 것이니 아무 노력없이 아이들 장난하듯이 얻은 것은 아니고 말할 수 없는 노력을 했더라는 것입니다.
'예사롭게 서로 속여 미혹케함이 아니다'함은 이러한 부사의해 탈경계를 일시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말할 수 없는 세월동안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서 성취한 것이지 쉽게 얻은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한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간다'는 말과는 반대가 된다고 생각할런지 모르겠으나, 저 과거를 통해 봐서는 그 사람이 무한한 노력을 한 것이지 금생에 조금 노력해서 된 것은 아닙니다. 과거동안 무한한 노력을 하여 모든 인연이 성숙되어 어떤 기연(機緣)이 있어서 확철히 깨치게 되는 것이지 아무런 노력없이 쉽게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상대도를 깨치기 위해서는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85.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밝고 밝은 부처님 법 조계에서 이었도다
건법당입종지여 명명불칙조계시로다
建法幢立宗旨 明明佛勅曹溪是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세운다' 함은 무애자재한 대해탈 경계를 나 혼자만이 수용하고 여기서 머물고 말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묘한 법을 깨쳐서 내가 완전히 수용할 것 같으면 일체 중생에게 보시를 해야 하고 공양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해탈의 길로 이끌어 자성을 깨치게 해야 되는 것이지 자기 혼자만 해탈의 길로 나갈 것 같으면 이것은 불법이 아니고 외도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을 펴기 위해서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세워서 일체 중생에게 미래겁이 다하도록 불법을 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누구에게 당신의 법을 부촉하였느냐 하면 조계산의 육조 혜능대사에게 이 정법을 전하게 해서 일체 중생들이 이 정법을 배우도록 유촉하셨다는 것입니다. 육조대사가 그냥 난데없이 평지돌출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부촉한 법을 이은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영가스님이 강력히 주장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