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이 말씀하신 화두(話頭)
그런데 화두를 말하자면 또 문제가 다릅니다.
화두를 가르쳐 주면서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옆에서 배우라고 해서 배운다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은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은 누구든지 아닙니까, 하고는 뭐라고 뭐라고 아는 체를 합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화두, 즉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눈을 떠서 확철히 깨쳐야 알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여 비록 몽중일여가 되어도 모르는 것이고 또 숙면일여가 되어도 모르는 것인데,
망상이 죽 끓듯이 끓고 있는 데서 어떻게 화두를 안다고 하는지, 이것이 조금 전에 말했듯이 큰 병입니다. 그럼 어째서 화두를 안다고 하는가? 껍데기만 보고 아는 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만 보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말 밖에 뜻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예전 종문의 스님네들은 ‘암호밀령(暗號密令)’이라고 하였습니다.
암호라는 것은 본래 말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이지요.
‘하늘 천(天)’이라고 말할 때 ‘천’ 한다고 그냥 ‘하늘’인 줄 알다가는
그 암호 뜻은 영원히 모르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안은 모두 다 암호밀령입니다.
겉으로 말하는 그것이 속 내용이 아닙니다. 속 내용은 따로 암호로 되어 있어서 숙면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큰 병통을 가진 이는 일본사람들입니다.
일본 구택대학에서 ‘선학대사전’이라는 책을 약 30여 년 걸려서 만들었다고 하기에 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니 중요한 공안은 전부 해설해 놓았습니다. 그 책을 보면 참선할 필요 없습니다.
공안이 전부 해설되어 있으니까. 내가 여러 번 말했습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 가장 나쁜 책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선학대사전‘이야.
화두를 해설하는 법이 어디 있어?‘ 구택 대학은 일본 조동종(曹洞宗) 계통입니다.
조동종의 종조 되는 동산 양개(洞山良介) 화상이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스님은 불법과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를 위해 설파해 주지 않았음을 귀히 여긴다.‘
화두의 생명이란 설명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또 설명될 수도 없고, 설명하면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죽어 버립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아무리 단청(丹靑) 이야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듣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가 눈을 떠서 실제로 보게 해줘야 합니다.
이처럼 조동종의 개조되는 동산 스님은 화두란 설명하면 다 죽는다고,
설명은 절대 안 한다고 평생 그렇게 말했는데, 후세에 그 종파의 승려들이 떼를 지어서
수십 년을 연구하여 화두를 설명한 책을 내놓았으니,
이것은 자기네 조동종이나 선종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조동종 양개 화상에 대해서도 반역입니다.
이렇게 되면 조동종은 종명(宗名) 을 바꾸어야 될 것입니다. 반역종(反逆宗)이라고.
일본에 이런 사람이 또 있습니다. 일본 불교학자로 세계적 권위자인 중촌원(中村元)이라 는
학자가 있는데, 언젠가 해인사에도 왔더라고 전해만 들었습니다.
그의 저서로 ‘동양의 사유방법’이라는 책이 있는데 유명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었습니다. 그 책 속에 보면 선종의 화두인 ‘삼 서 근(麻三斤)’에 대해 ‘무엇이 부처님이냐고 물었 는데
어째서 ‘삼 서 근’이라고 대답했는냐 하면, 자연 현상은 모든 것이 절대이어서 부처님도 절대이고 ‘삼 서 근’도 절대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물은 데 대해 ‘삼 서 근’ 이라 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딱 잘라서 단언을 해 버렸습니다.
큰일 아닙니까? 혼자만 망하든지 말든지 하지, 온 불교를 망치려고 하니......
그러나 그의 스승인 우정백수(宇井佰壽)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이렇게 아주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이것이 학자적인 양심입니다.
자기는 안 깨쳤으니까, 자기는 문자승(文字僧)이니까 선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만 기록했지
선법문, 선리(禪理)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도 하지 않고 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학자의 참 양심입니다.
그런데 중촌원은 화두에 대해 딱 단안을 내리고 있으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화두를 설명하려고 하면 불교는 영원히 망해 버리고 맙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화두의 하나인 ‘뜰 앞의 잣나무(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에 대해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선종에서 유명한 책인 ‘벽암록’에 송(頌)을 붙인 운문종의 설두 스님이 공부하러 다닐 때
어느 절에서 한 도반과 ‘정전백수자’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이야기 하다가 문득 보니 심부름하는 행자(行者)가 빙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간 후에 불렀습니다.
“이놈아, 스님네들 법담(法談)하는데 왜 웃어?”
“허허, 눈멀었습니다. ‘뜰 앞의 잣나무’는 그런 것이 아니니,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