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울산성 전투 (4) - 전투의 공략 실패와 원인
선조31년(1598) 正月 1日
부총병 이방춘과 해생(해생)의 두 장수는 군사를 데리고 강 서쪽 연안으로 가서 주위에 있던 인가를 불을 놓고 이 불타는 연막을 이용해서 배를 타고 일거에 성에 돌입하려 하였으나 적진에서 이 작전을 알아차리고 일시에 포격을 하는지라 접근하던 배가 파선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날도 급보를 받은 왜군의 여러장수들은 구원병을 이끌고 속속 서생포 성으로 모여 들고 있었다.
1월 2일
이날은 서생포와 부산포에서 온 왜군의 배가 염포 앞바다에 수백척이 떠 있었다.
이를 알게된 경리 양호는 유격장 파새와 파귀에게 병력을 데리고 전탄 (태화강 하류) 방면에 달려나가 막게하는 동시에 부총병 吳惟忠과 유격장 茅國器의 병력을 강안으로 나가 그들의 상륙지점을 차단케 하였다.
이때 공성구의 사기는 연일 계속되는 한파로 군사는 추위에 떨고 군마 또한 기한으로 죽어 군영은 쓸쓸하기 그지없고 성을 함락시키려던 희망은 사라지고 있었는데 이때 서생포의 모오리는 여러장수들과 회의하여 원군의 부서를 정하고 병력 1만3천명이 이날 서생포를 떠나 약40리 북상 하여 下倉(청량면 상북리) 부근에 진을 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구원군이 오는 것을 눈치챈 성안의 적군 사기는 높아갔으나 보급상태는 아사 직적에 있었다.
이날 명군에 종군하고 있던 오까모도가 살짝 성밑에 와서 명군측에 詭計가 있음으로 내일 會盟에는 기요마사가 나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밀고하고 돌아 갔다.
1월 3일
이날 아침에 적장 가또오는 동정군의 경리 양호와 회담키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나오지 아니하였고 군사를 보내보았으나 가부간의 답변조차 없었다.
이에 격분한 양호는 성 주위로 大炬를 만들어 세우고 이튼날 새벽까지 공성을 계속했으나 희생자만 많았고 성에는 단 한사람도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때 양산성에 있던 구로다는 6백의 군졸을 이끌고 울산근방에 진출하여 성중의 기요마사와 연락하기에 이르렀고 고니시등의 2천병력도 해로로 순천을 떠나 이날 울산근해에 그 깃발을 나타내었다.
또 우기다의 병력도 부산으로부터 울산의 10리밖까지 와서 진을 치고 이들이 동정군을 역포위 할 기세를 보이었다.
이러한 적군의 움직임을 척후병으로부터 보고 받은 경리 양호는 그 대책을 강구하기를 명일을 기하여 승패를 가름하는 마지막 총공격을 가하기로 하고 여러장수들에게 통달하였느나 날씨는 차기만 하고 천지는 얼어 붙어 있었다.
1월 4일
이날 새벽에 최후의 총공격을 감행하여 결전을 서둘렀다.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는 모든 군사를 총동원하여 4面에서 성을 공격함에 있어 화공으로 적을 성 밖을 몰아내기 위해 炬火를 피워놓고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경리 양호는 퇴각하는 군사의 목을 한칼로 베게하는 한편, 싸움에 뜻이 적은 유격장 李化龍을 포박하여 진중에 돌려보이게 하니 군사들은 서로 앞다투어 나가 싸웠다.
그러나 동천이 밝기시작하자 적은 일제히 반격에 나서 포화를 퍼부어 공성군에 사상자가 5백에 이러렀다. 그 뿐 아니라 성에는 아무도 오르지 못하였다.
이때 남강에 떠 있던 왜선 90여척이 일제히 태화강에 들어와 군사를 상륙시켰고 또 육지의 적군도 우리군의 배후에서 퇴로를 차단하려하여 정세는 급변하였다.
그리하여 양호는 접반사 이덕경을 불러서 “매일 우리가 공격해도 워낙 성이 험하여 뺏기 힘들 뿐 아니라 군사 또한 많이 없어졌소, 이 판에 왜군의 구원병이 많으니 그냥 철군했다가 뒤에 다시 공격을 꽤해야 겠소”라고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날밤 경리 양호는 파새와 양등산은 후위를 맡게하고 물러나서 밤사이에 경주에 이르렀다. 적의 구원병들은 동정군의 철퇴를 알고 다투어 상륙하여 30리까지 추격 하여 동정군의 희생자가 많았다.
도원수 권율은 몸소 마지막 후미에서 추격하는 적중에 뛰어들어 수십명의 목을 베니 적은 더 따라오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또 경상우병사 정기룡은 철수하는 도중에 포위되고 말았는데 말을 급히 몰아 검을 휘두르며 돌격하여 좌충우돌 적의 목을 베니 도적들은 길을 열어주고 감히 추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동정군측에서 절강의 군사와 祖承訓의 馬兵은 뒤늦게 철수하다 전멸했으며 유격 진우,양만금 진우중 등이 적탄에 쓰러지고 조명양군이 내버린 식량과 무기는 길 위에 이루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울산성 전투의 공략 실패와 원인
울산성 공략 실패의 원인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찾아진다. 먼저 왜군의 구원병이 각지에서 급속히 집결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구원병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은, 수성군에게는 커다란 희망을 주는 대신, 공성군에게는 초조감과 불안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구원군은 신속히 도착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공성전이 12월과 1월의 혹한기에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기후의 한냉과 불순은 수성군보다 공성군에게 더욱 크게 불리하다. 수성하는 자는 냉기를 어느정도 피할 만한 진지나 참호 등이 있으나 공성자는 한냉하고 불순한 풍우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공성 준비가 부족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전투경과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듯이 눈에 띄는 공성장비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예로부터 공성군의 병력과 장비가 수성군의 것보다 3배가 많아야만 성공할수 있다는 것이 전술의 정설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수성군이 오히려 준비가 치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먼저 신성을 높고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아성과 제2, 제3의 본성을 쌓았으며, 그 외곽에 다시 토제와 목책을 둘러치고, 한편으로 성 남쪽 면을 태화강과 연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