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진정국사 천책 스님이 민호에게
사람의 초심은 참되므로 성인과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묘한 뜻은 도를 품고 살아야 겨우 알 수 있으므로 부처님께서는 지혜가 없는 사람들에게 이 경(법화경)을 말하지 않도록 부탁했습니다. 바라건대 민 학사께서는 마음을 쏟아 큰 신심을 내기 바랍니다.
아직 산승의 공부가 깊은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불교의 내·외전과 인도 고대의 경전 등에 대해서는 조잡하나마 대강은 알게 됐습니다. 그대도 아직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법에 미치지 못했더라도 도를 사모하는 마음은 오히려 노장용과 왕창령 무리에 못지않습니다.
때때로 돌이켜 자신을 늘 살펴본다면 산승의 메마른 말을 빌지 않더라도 스스로 깨닫고 크게 한 번 웃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바랍니다.
산승이 이제 글을 마치려합니다. 강남의 2월에 자고새가 울기 시작하고 진달래 떨기가 처음 피어나니 만수강산이 아름답습니다. 삼가 답을 올립니다.백련사 대웅보전의 천책스님 위패.
13세기 고려 진정국사(1206∼?) 천책 스님이 36세 때인 1241년 운대아감 민호에게 보낸 답장이다. 민호는 천책 스님이 18세 때 최고교육기관인 국자감에 입학한 후 만난 오래된 벗이다. 그는 먼저 스님에게 산 속에서 오랫동안 수행하는 스님의 안부를 묻고 백련결사가 외침을 막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보낸다.
여기에 스님을 위한 가사와 물베개, 그리고 정성이 담긴 납촉 두 자루도 함께 동봉했다. 이에 천책 스님은 반가움과 고마움으로 자신이 출가하게 된 경위와 국내외 사정, 전란에 대처한 불자들의 선례, 한국불교의 역사 등을 상세히 기록한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불교를 깊이 공부해 참된 삶의 이치를 깨치기를 바라는 간절한 당부도 잊지 않고 있다.
천책 스님은 만덕산 백련사 4대 주지로 수선사 정혜결사와 함께 고려 양대 결사라 일컬어지는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고려의 천태종을 중흥시킨 스승 원묘국사 요세(1163∼1245) 스님의 사상과 교화를 계승해 보현신앙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천책 스님은 스승 요세 스님이 지방 평범한 출신이었던 것과는 달리 개경의 문벌집안에서 태어났다. 편지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 7∼8세에 이미 주요 유교경전과 문집을 다 공부할 정도로 학문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18세 때는 국자감시험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약관의 나이에 예부시(禮部試)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도 불구하고 그의 갈등은 깊어져 갔다. 왕을 허수아비로 만든 최충헌 일족이 정권을 휘두르는 속에서 학자란 단지 그들의 비위에 맞출 수밖에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까닭이다.
때마침 좌주의 부탁으로 법화경을 필사하던 그는 불교의 심오함에 깊은 감명을 받고 23살 되던 해 출가를 결심한다. 그는 백부를 찾아가 출가의 뜻을 밝히자 “훌륭한 가문에 태어나 약관에 급제하고 앞날이 환한데 출가를 왜 하느냐”고 거듭 타일렀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명성이란 허상에 불과하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남도의 만덕산 요세 스님에게로 출가한다.
세속의 삶을 등진 스님은 그 때부터 불교공부에 매진하는 한편 스승을 도와 백련결사 운동에 매진한다.‘서참회(徐懺悔)’라고 불릴 정도로 실천성이 강했던 스승은 이론이나 저술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천책 스님은 이러한 스승을 보좌하고 스승의 실천이론을 대서(代書)하는 대변자 역할을 자처했다.
요세 스님에게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었다. 요세 스님이 입적한 후 그는 스승의 결사를 이어 참회와 정토신앙을 널리 알림으로써 수많은 사람을 교화했다.
천책 스님의 생애가 빛나는 것은 정혜결사가 훗날 무신정권과 결탁했던 것과 달리 끝까지 거부했고 오히려 당시 문인들이나 고위 관직자들과의 서신왕래를 통해 어떤 것이 바람직한 삶인가를 보여주려 애썼다는 점이다.
조선후기 험난한 시기를 살아야 했던 다산 정약용이 『만덕사지』의 편찬을 통해 스님을 주목했던 것은 탁월한 문장력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 시대에 영합하지 않은 꼿꼿했던 스님의 삶 때문이었다. 스님의 삶이 진솔하게 나타나 있는 이 편지는 좬호산록좭에서 찾아볼 수 있다.
8. 원감국사 충지 스님이 元 황제에게
생각하면 이 수선정사(修禪精舍)는 보조성사(普照聖師)가 창립하면서부터 이 나라의 선불장(禪佛場)으로 선을 닦는 이가 수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또 대국 임금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곳으로도 하루 종일 그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습니다.
깊은 숲 속에 자리 잡고 도심을 멀리 떠나 있는 탓에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기를 기대할 수 없어 낮에 밥 먹고 새벽에 죽 먹는 것도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이런 까닭에 옛날 임금께옵서는 오랫동안 가까운 읍의 농지를 주셔서 재(齋)를 지내는데 충당토록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국의 관리는 군량미를 위해 이 곳의 토지대장과 호적을 찾아 땅을 빼앗고 세금을 물리고 있습니다. 이에 형세는 물을 잃은 붕어의 부르짖음과 같고 정황은 하늘에 들리는 학의 울음처럼 절박하기만 합니다.
1274년 충지(冲止, 1226~1292) 스님은 원나라 세조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 ‘상대원황제표(上大元皇帝表)’를 올린다. 이는 스님의 목숨을 건 모험이었으며 고려 불교계에 어떤 파장이 미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스님이 편지를 쓸 무렵은 대몽항쟁을 이끌었던 고려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위해 총력을 기울일 때였다. 힘없는 백성들은 오랜 전란으로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고 건장한 사람들은 대부분 부역으로 끌려갔을 정도로 인적·물적 수탈이 극에 달했다.
사찰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특히 무신정권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수선사의 살림살이는 극도로 궁핍했다. 스님의 시에서 나타나듯 공양 때는 풀뿌리의 나물로 대신해야 했고, 온통 기운 누더기와 다섯 쪽으로 깨어져 꿰맨 발우를 써야 했다. 이런 상황에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해 토지세를 물리고 땅까지 빼앗아 갔던 것이다.
스님은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빼앗아간 토지와 식량을 돌려달라는 표를 올린 것이다. 당시 고려불교계가 원나라의 불신을 받고 있었고 더욱이 수선사(修禪社)가 무신정권과 친밀했었다는 점에서 이는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이 편지를 받아본 원 세조는 스님의 탁월한 식견과 뛰어난 문장력에 매료돼 토지를 돌려준 것은 물론 황실로 초청까지 하게 된다.
수선사 제6세로 원감국사라는 시호로 받는 충지 스님은 처참했던 시대에 위로는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민생의 처절한 아픔을 감싸려 했던 인물이다. 스님은 혜심, 천책, 탁연 스님 등과 마찬가지로 급제한 문인출신이었다.
전남 장흥에서 태어난 스님은 9세에 유교 경서를 암송하였으며, 17세에 사마시에 합격할 정도로 대단히 총명했다. 19세에는 장원으로 뽑혀 영가서기(永嘉書記)에 부임했고 이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뛰어난 시재와 문장을 떨치기도 했다.
스님이 출가한 것은 그의 나이 29세 되던 해다. 어려서부터 출가의 뜻을 세웠지만 부모의 뜻을 얻지 못해 미루다가 뒤늦게 수선사 제5대 사주인 원오국사의 문하로 출가한 것이다. 비구계를 받은 스님은 화엄경의 선재동자처럼 전국 각지를 돌며 구법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가 머문 곳마다 절은 크게 확장됐고 때로 방장이 돼줄 것을 부탁받는다.
그러나 스님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끝없는 만행(萬行)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 이 때 지은 수많은 시들은 당시 민중들의 고단한 삶과 이를 안타까워하는 스님의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백성들이 전역에 가니 고을은 비었고/ 말은 달려 강가로 가네/ 밤낮으로 벌목하여/ 전함 만들다 힘은 다했고/ 한자의 땅도 개간하지 못하였으니/ 백성들은 어떻게 목숨을 이어가나/ 집집마다 묵은 양식도 없고/ 태반은 벌써 굶주려 우는데/ 여기에 농사마저 잃었으니/ 이젠 죽음만 남겨 놓았을 뿐이구나/ 슬프다 나란 무엇 하는 사람인가/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 내리네/’(흑양 사월 빗속에서 中)
‘팔은 있어도 모두 묶여 있고/채찍 받지 않은 등짝이 없네/ 소와 말의 등은 다 부르텄고/ 사람들 어깨는 쉴 새가 없구나/ 고을마다 반은 집을 비웠고/ 마을마다 농사는 폐했네/ 처자식은 땅에 주저앉아 울부짖고/ 부모는 하늘보고 통곡하는구려/ 삶이란 진정 가련하구나/’(영남의 간고했던 형편 中)
중생구제를 위해 출가했음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무력감. 죽어가는 수많은 민중들 앞에서 눈물밖에 흘릴 수 없는 스스로에 질책과 통탄이 뼈아프게 묻어난다.
스님의 사상에 수선사의 전통적인 선사상과는 다른 미타정토신앙과 관음신앙이 엿보이는 것도 이들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려했던 스님의 안타까운 심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원 황제에게 보내는 글에서 원의 황제를 순(舜) 임금에 비교하기도 하고, 그 은혜가 높음을 찬탄하는 표현이 간혹 보인다.
그러나 원과의 싸움에서 아버지가 붙잡혀가고 수많은 동포들이 원나라에 의해 잔혹하게 죽어가는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이럴 수밖에 없었던 스님의 깊은 고뇌가 읽혀진다. 스님의 시와 편지들은 『원감국사집』으로 묶여 전해지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독(毒)의 뿌리이며,
입은 재앙의 문이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며,
몸으로 그 재앙을 받는다.
(변의장자자경)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지도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지도 말라.
오직 현재의 한 생각만을 굳게 지켜라.
(법구경)
학문을 익히고 기술을 익히며,
몸을 잘 다스리고 훌륭한 말을 하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숫타니파타)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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