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한민국 청년들은 청년 실업의 문제와 함께 노량진으로 몰리고 있다.
공무원은 안정적인 직장,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소득, 연금 등과 함께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있어 많은 문제점이 양산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몰리면서 이공계의 인력 실태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으로 몰리는 사회가 좋은 것인가?
조선은 그 답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 시대 공무원과 대한민국의 공무원 직급 비교
대한민국 공무원이 1급에서 9급으로 분류되듯이,
조선도 1품부터 9품까지 9개의 품계로 나뉘어져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정1품부터 종9품까지 18개의 품계가 존재한다.
양반 관료 사회가 발달한 조선에서는,
과거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이 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리고 출세의 수단이었다.
그러다보니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교육열이 굉장히 성행했고,
심지어 한양 거리에는 과거 시험만 담당하던 전문 사교육 기관이 출연했다.
사교육 기관의 교수와 선생은 주로 은퇴한 고위 공무원(정1~4품)이 맡았고,
이들은 과거 시험 대비반을 편성해 생계를 유지했다.
물론 학원에 다닐려면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했다.
당장 인조 때에 공무원 시험 세태와 관련해서 조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제기됐다.
상(인조)께서 이르기를,
"정묘년에 오랑캐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환란에 처했는데,
선비들은 공직에 나아가고자 지방에 내려가 공부만 했다고 하니,
이것이 나라에 대한 도리라 할 수 있겠는가?"
당장 정묘호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선비들은 짐을 싸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산골로 내려가 공부에 몰두했다고 비판하는 대목이다.
인조의 말에 오늘날 교육부 장관인 예조 판서(정2품 고위 공무원) 김상헌의 대답이 압권이다.
예조 판서(교육부 장관, 정2품 고위 공무원) 김상헌이 아뢰기를,
"한양가에 20~30년을 준비하고도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자들이 있사온데,
끝내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고 가문은 파탄나고 가난에 허덕이는 양반들이 많사옵니다.
모두가 공직에 나아갈 길만을 노리며 과거 시험에 몰두하는데,
만약 우리 나라의 세태가 이러하다면
나라가 위급할 때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있겠습니까?"
조선에서도 오늘날처럼 고시 낭인이 있었던 듯 하다.
인조 때 변경에서의 위기 심화와 대외 정세의 변화와 맞물려,
공무원 시험에 대한 많은 비판이 제기됐다.
수많은 고시 낭인의 양산과 함께,
양민들이 군역을 회피하고자 농사도 짓지 않고 공부를 하고 있다는 소식도 제기됐다.
인조는 즉위 초에 본인은 물론이고 조정의 고위 공무원과 장관직들에게
갑옷을 입고 행정 업무를 처리하라고 할 정도로 전쟁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10년 동안 놀고 먹는 자들을 서쪽 변방에 종군하게끔 하였다.
한편 중앙 행정 공무원의 녹봉을 1/3 삭감하고
군비 확충에 투자하여 군인 공무원에 대한 대우를 늘렸는데,
이는 병력 증가와 후금(청)에 대한 대처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양반의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다.
상(인조)께서 말하기를,
"오늘날 유자(선비를 낮잡아 이르는 말)들은 과거 시험에 준비한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먹고 있다.
서원에서는 과거 시험을 핑계로 백성의 고혈을 쥐어 짜내고 있으며,
양반들은 자신들의 위세를 이용해 백성의 지분으로 시험을 준비하고 있으니,
나라의 꼴이 이러하다면 누가 변방에 종군해 공을 세울 수 있겠는가?"
당시 중앙 정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이조 판서(정2품) 최명길은 다음과 같이 아룄다.
이조 판서(정2품 공무원) 최명길이 아뢰기를,
"나라가 문(文)을 숭상한 지 오래라 폐단이 쌓여 있습니다.
기계와 병기를 잡을 지도 모르는 한심한 자들이 많이 있고,
병법도 모르는 자들이 지휘권을 쥐고 있으니,
변란이 일어난다면 우리나라는 바람에 쓸리듯 무너질 것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1640년(인조 18)에
인조는 청의 침입에 대비하여 문관을 줄이고 무관을 늘리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그 결과 팔도의 편오군 101,914명, 무사 10,717명, 제색군이 299,476명으로,
장부상 39~40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군사의 지휘권은 행정 공무원인 문관이 쥐게 되었고,
지휘 계통상의 여러 문제점도 낳았다.
그리고 장부상의 병력과 실 수효도 맞지 않았다(탈영, 이탈).
이렇듯 조선 시대에서도 고시 낭인의 양성과 함께
공무원 시험에 대한 많은 문제점이 존재했다.
조선 시대 공무원(과거) 시험은 당연히 서술형 시험인데,
대한민국의 5급 행정 고시 공무원 시험도 서술형 시험이 존재한다(PSAT 객관식).
5급 행정 고시 공무원 서술형 시험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은 정기적으로 3년에 1번씩 시행됐는데,
응시자 숫자가 평균 6만 3천 명을 상회했다.
그러나 최종 합격자는
장원 1명 : 종6품(6급 공무원)
갑과 2명 : 정7품(7급 공무원)
을과 7명 : 정8품(8급 공무원)
병과(23명) : 정9품(9급 공무원)
조선 시대 공무원 최종 선발(3년에 1번)
최종 33명 선발
평균 지원자 : 6만 6천 명(조선 후기)
평균 경쟁률 : 1 : 2000
수만 명이 지원했으나, 최종 선발 인원은 33명이었고,
그마저도 성적 순서대로 6~9품까지 차등으로 임명했다.
이러니 고시 낭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부할 내용도 까다로웠다.
오늘날 헌법, 행정법 등을 치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에는 이전의 시대와 다르게 나름 행정 체제가 잘 잡히면서
성문화된 법전이 등장했다.
경국대전과, 명나라의 형법인 대명률을 빠삭하게 알아야 했고,
유교 경전은 물론이고 중국 역사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알아야 했다.
조선 시대 공무원들은 왕 앞에서 시무책에 대해 논의할 때,
꼭 중국의 역사나 고사를 인용하여 이야기했다.
군사 개혁책이나 자강책에 대해 논의할 때는
촉나라 승상 제갈량이 함곡관으로 진출한 이야기,
또한 나라의 폐단에 대해 논의할 때는
시황제나 수양제의 사례를 들어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과거 시험의 주제도 시대마다 달랐다.
가령...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는 대마도 정벌을 계획했는데,
그해 과거 시험에서 다음과 같이 시험 문제를 출제했다.
"우리나라가 왜적에게 갚아야 할 만세의 원분이 있는데,
대마도 정벌을 할려면 우리나라가 갖추어야 할
병력, 기계, 군마, 군량 운송, 도로 정비, 해상 교통에 대해 논하시오."
당시 유교 경전 위주로 학습한 선비들에게 꽤 쇼킹한 주제였다.
광해군 때에는 공법(대동법)의 시행 가부에 대한 문제가 출제됐고,
인조 때에는 갑옷의 수선과 변방의 방어책에 대한 문제가 출제됐다.
과거 시험의 주제는 평화로울 때 주로 유교 시책과 도리에 대한 문제가 출제됐으나,
변경의 위기와 맞물리면서 문과에서도 국방과 관련한 내용이 출제되었다.
참고로 기술직 공무원은 각 관청에서 따로 선발했다고 한다(의학, 법학, 기계).
그렇다면 조선 시대 공무원 선발과 관련한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
워낙 관료 공무원 사회가 발달한 나라다 보니깐
공무원에 대한 특혜가 굉장했는데,
이게 나라의 재정을 휘청거리게 할 정도였다.
현재 가치로 계산한 조선 시대 공무원의 연봉
정1품 공무원 : 1억 3천만 원(15세기)
종9품 공무원 : 1848만 원(15세기)
조선 시대 공무원들은 녹봉표를 제출해 봉급을 지급받았는데,
정기 월급 외에도 왕과 왕세자, 왕실 어른의 탄생일에 맞춰 보너스가 지급되었다.
또한 명절 휴가비와 여타 급여가 굉장히 강했는데,
이것 말고도 고위 공무원에게 엄청난 급여가 수여되었다.
특히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8회에 걸쳐
정1품부터 종3품까지 고위 공무원 905명에게 도합 1119만 4440냥의 막대한 급여를 하사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477억 정도이다.
1인당 4.9억씩 배분된 셈이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과거 시험이 시행됐는데,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나름 학문적인 부분에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러나 아들 이방원이 과거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하면서(고려 왕조 시절)
아버지 이성계의 콤플렉스를 완화해 주었고,
게다가 과거 출신 엘리트였던 신진 사대부의 힘에 업어 조선 개국에 큰 힘을 발휘했다.
이러한 것이 배경이 되어 조선은 교육열이 굉장히 강해 과거 엘리트를 우대했고,
위에서 본 것처럼 그 혜택 또한 상당했다.
노비로 재상이 된 반석평, 초라한 전 주인 아들을 보고 절을 하다
법적으로는 양민들에게도 과거 시험의 기회가 열려 있었는데,
연산군 때에는 노비 출신이었던 반석평이 종 노릇을 하면서 틈틈히 공부를 했었다.
(원래 노비는 과거 시험 x)
그리하여 1507년(중종 2)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8품 공무원)이 되었고,
10년 후에 경흥부사(5품 공무원)에, 다시 10년 후에 함경북도병마절도사와 충청도관찰사(종2품 공무원)까지 역임하였다.
마침내 노비 출신으로 유일무이하게 중앙 정부의 장관직인 공조 판서(정2품 장관직 공무원)까지 올랐다.
아무튼 고려 말에 과전법을 시행하여 과거 엘리트 출신 신진 사대부들에게 분급되었는데,
경기도 토지를 대상으로 한 과전법에서 과거 출신 공무원들이 장악한 토지 평가액만
무려 2690만 8800냥이었다.
현재 가치로 1조 763억에 달했는데,
중앙 공무원들은 상당한 경제적 지위를 누렸다.
현직 공무원에게 하사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직전법을 시행한 세조
그리고 공무원들은 지방에서 소유한 사유지에서 양민과 노비들을 부리며
토지를 개간케 하여 부수적인 수입도 굉장히 많았다.
이로 인해 조선의 경제적 사정은 굉장히 악화되었고,
인조 때에는 과거 출신자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비판까지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