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서 부치는 선지식의 편지
인터넷 등 통신매체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오늘날 편지의 기능은 연말연시에 보내는 연하장이나 혹은 청첩장, 은밀한 사랑을 고백하는 연서에서 그치기 쉽다. 하지만 불과 100여년전만 하더라도 편지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장 보편적인 통신수단이었다. 그런 까닭에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 편지에서는 화선지보다 진한 그리움과 구구절절 애틋한 사연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학문을 하는 선비들의 편지는 사상과 문학을 담아내는 매개체 역할을 했고 활발한 토론의 장이 되었음도 어쩌면 당연하다.
옛 스님들의 편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한 평생 수행하고 경전을 공부했던 탓에 스님들의 편지는 살아 있는 법문이며 깨침을 독려하는 경책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스님들의 편지는 경전처럼 소중하게 받들어 지거나 후학들의 영원한 교재가 되기도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스님의 글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용수(150∼250)보살의 편지다. 한역본과 티베트본으로 우리에게 전하는 『친우서간(親友書簡)』이라는 글은 당시 용수보살이 남인도 사타마하나왕조의 신두카라는 왕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글이다. 용수보살은 이 편지를 통해 불교의 윤리덕목과 대승불교의 왕도정치 및 해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오늘날까지 불자들에게 큰 가르침이 되고 있다.
중국으로 건너오면 스님들의 편지는 더욱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불교의 전통교육기관인 강원에서 배우는 『서장(書狀)』과 『치문경훈(緇門經訓)』에도 스님들의 글이 수록돼 있다. 대혜(1089∼1163) 스님의 『서장』은 말 그대로 ‘62편의 편지 모음집’으로 스님이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자백가의 경서를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팔만대장경 속 부처님과 조사들의 가르침들을 거침없이 활용하고 있는 ‘천고(千古)의 절서(絶書)’로 평가받는다.
또 스님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하는 『치문경훈』에도 10편의 편지들이 실려 있다. 불법의 오묘함과 탁월함을 밝힌 이들 편지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중국 조동종의 개조인 동산양개(807∼869) 스님의 편지다. 여기에는 스님이 부모님께 출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편지와 출가한 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들을 잊지 못하는 부모님을 위해 쓴 편지가 실려 있다. 또 스님의 어머니가 마침내 아들의 뜻을 이해하고 부디 도를 깨우쳐 중생을 제도하라는 간절하고도 슬픈 서원이 담긴 답장이 함께 수록돼 있다. 최근 우리나라 불자들 사이에서 많이 읽히는 중국 인광(1861∼1940) 스님의 『화두놓고 염불하세』(불광출판부)의 대부분 글들도 불자들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이 편지들에는 평생을 염불수행으로 살아왔던 스님이 중생들을 위해 밝힌 심오한 진리들이 문장문장마다 스며 읽어 오늘날 한국불자들에게도 큰 감명을 주고 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명정 스님에 의해 경봉(1892∼1982) 스님이 근대 최고의 선지식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소개돼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들의 편지는 근대 뿐 아니라 신라 때부터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한국 스님의 편지는 아니지만 중국화엄학의 체계를 세운 현수법장(643∼712) 스님이 사형인 의상(625∼702) 스님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해 고려의 의천, 원감, 나옹, 태고 스님 등과 조선의 부휴, 환성, 정관, 중관, 묵암, 연담, 초의, 범해 스님 등 수많은 스님들의 편지들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이 편지들에는 산사에서의 생활에 대한 담담한 이야기를 비롯해 법에 대한 치열한 논쟁, 세간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 유생들에 대한 질책 등 이 담겨 있다.
‘중생의 예토가 보살의 정토다. 따라서 예토를 떠나 정토를 구하는 것은 허공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는경전의 말씀처럼 스님들의 편지에서는 이 땅에서 정토의 삶을 살려 했던(혹은 살았던) 수많은 선지식들의 문자향(文字香)을 만날 수 있다.
자, 이제 옛 스님들의 정취가 듬뿍 배어 있는 편지의 세계로 떠나보자.
당 숭복사 승려 법장은 해동신라의 대화엄법사께 글을 올립니다.
작별한지 20여 년에 흠모하는 지극함이 어찌 마음에서 떠나리오. 구름 자욱한 머나먼 만리길, 바다와 육지가 천 겹으로 막혀 다시는 만나뵐 수 없음을 한하노니 그리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나이까.…듣자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화엄을 강연하고 법계의 무진연기를 드날리시어 새롭고 새로운 불국(佛國)에 널리 이익케 하신다고 하오니 그 기쁨이 한량없습니다. 이로써 여래가 입멸하신 후 불일(佛日)을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돌려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 할 이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나이다.
법장은 정진하였되 성공한 것이 없고 널리 폄이 더욱 적어 이 경전(화엄경)을 우러러 생각할 때에 돌아가신 스승님을 저버림이 되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다만 스승님의 주해가 뜻은 풍부하나 글이 간결하여 후학들이 그 뜻을 알기에 어려운 점이 없지 않음으로 스승께서 하신 미묘한 말씀과 오묘한 뜻과 요지를 갖추어 어렵게 의기(義記)를 작성했습니다. 근래에 승전(勝詮)법사가 이를 베껴 고향으로 돌아가 신라에 전한다 하오니 스님께서는 그 잘잘못을 자세히 살펴보시고 요컨대 가르침을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엎드려 원컨대 내세에서는 이 몸 버리고 새 몸을 받아 서로 노사나(盧舍那)에서 무진묘법(無盡妙法)을 함께 듣고 이 같은 다함 없는 보현의 원과 행을 수행하기 바랍니다. 만약 제가 악업이 남아 하루아침에 지옥에 떨어진다면 스님께서는 옛 일을 잊지 마시어 바른 길로 이끌어주시길 엎드려 원하옵니다. 혹 인편과 서신편이 있을 때마다 생사나 물어주시기 바랍니다. 격식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법장 화남 1월 28일
국경-연령 초월한 훈훈한 道伴愛
의상(義相, 625∼702) 스님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온 것은 그의 나이 46세 때인 670년이었다. 10여년 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국 땅을 다시 밟은 스님은 해동화엄의 초조(初祖)답게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후학들에게 화엄의 오묘한 세계를 강설하고 있었다. 당나라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 스님으로부터 편지와 책을 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
법장 스님은 방대한 화엄사상을 집대성함으로써 중국화엄종의 실질적인 개조라고 평가될 정도로 중국불교사의 한 획을 그은 대학승이다. 지엄 스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선후배이며 도반이었던 이들에게 서로 다른 국적과 18년이라는 나이 차이는 우정의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이 편지는 법장 스님이 20여 년 동안 못 본 선배를 생각하며 간절한 그리움과 신라에서의 눈부신 활동을 찬탄하는 말로 시작한다. 특히 산과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이역만리에서 다시 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연모의 정은 1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생생하게 전달된다. 특히 의상 스님을 상인(上人)이라고 표현하는 점이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불교를 빛내고 불법을 이 땅에 오래 머물도록 할 사람은 의상 스님밖에 없다고 칭송하고 있음도 눈 여겨 볼만하다.
그러나 이 편지에는 그리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에 대한 진지한 열정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측천무후로부터 현수(賢首)라는 법호를 받을 정도로 중국 내에 명성이 자자하던 법장 스님이 자신의 저술인『화엄경탐현기』를 비판해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편지를 받은 의상 스님은 스승 지엄 스님의 가르침을 친히 듣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제자들에게 깊이 공부하도록 했다고 전한다.‘당현수국사치신라의상법사서(唐賢首國師致新羅義湘法師書)’라고 불리는 이 편지는 고려 의천 스님의 『원종문류』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1954년 실제 편지가 대만에서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일본 텐리다이가쿠(天理大學) 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이 편지는 세로 35cm 가로 68.5cm 크기에 21행 319자로 이뤄져 있으며, 그 오랜 세월에도 마멸된 글자하나 없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2. 동산양개 스님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엎드려 듣자오니 어렸을 적에 젖을 먹여 주신 정이 소중하고 길러주신 은혜가 깊으니 온갖 재물과 좋은 음식으로 봉양할지라도 어찌 다 갚을 수 있으리오. 망극한 은혜를 갚고자 할진대 출가한 공덕만한 것이 없는지라. 생사의 집착을 끊고 번뇌의 고해를 넘어 천생의 부모에게 보답하고 만겁의 자애로운 육친에게 보답하고자 하나이다.
양개는 금생의 몸과 생명을 버리도록 맹세코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영겁의 육근·육진을 가지고서 단박에 반야를 밝히려 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부모님께서는 아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시어 연연해 마시고 정반왕(싯다르타의 아버지)을 배우시고 황후 마야를 본받으시옵소서.
모름지기 눈물을 뿌리며 자주 떠올리지 마시고 애당초 나의 몸 없는 것 같이 여기소서. 권속의 애정을 하직하고, 불법을 밝혀 자애로운 어버이에 보답하고자 하나이다. 수풀아래에서 흰 구름으로 항상 도반을 삼고, 문 앞에 푸른 봉우리로 이웃을 삼으오리다.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벗어나고 인간의 애정과 친함을 영원히 결별하오이다.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스님은 중국 당나라시대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으로 묵조선(默照禪)을 개창한 분이기도 하다. 당시 문하에 1000여 명이 수행했을정도로 스님의 수행과 교화력에 대한 명성이 자자했으며 한국과 일본불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저장성(浙江省)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스님은 21세 때인 827년 쑹산(崇山)에서 영묵 선사를 은사로 구족계를 받는다. 동산 스님이 부모님께 편지를 보낸 것도 이 무렵이다.
스님은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부모님에게 출가의 뜻을 밝히는 편지를 보낸다. 부모가 낳아주고 길러준 은혜가 태산 같아 혈식(血食)으로 봉양해도 다함이 없음을 통감하지만 천생과 만겁의 부모에게 보은하기 위해서는 피안의 언덕을 넘지 않을 수 없음을 간곡하게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불법을 깨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라지만 금지옥엽 키운 자식을 떠나 보낸 어머니의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한 해 두 해 오 년 십 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날이면 날마다 기다린다는 어머니 소식을 접한 스님은 또 한 통의 편지를 띄운다. 동산 스님이라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어찌 없을까.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자신을 기다리지 말고 불교에 귀의해 이별의 정을 잊을 것과 함께 형과 아우에게는 자신이 못다한 효를 다해 줄 것을 부탁한다.
또 자신은 어머니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최선을 다해 수행할 것과 그런 아들을 애달프게 바라보지 말고 죽은 자식처럼 여기시길 바란다는 애달픈 당부의 말과 함께….
그러나 부모의 마음을 어찌 자식이 헤아릴 수 있으랴. 백천마디 말로도 표현 못할 애틋한 그리움이 가슴에 옹이처럼 박혔을 어머니가 마침내 스님에게 답신의 편지를 보낸다. 갖은 고생을 하며 키운 아들이 집을 떠나간 후 늘 문밖을 지켜보며 산다는 어머니는 이제 누구를 의지하며 사느냐고 통곡한다.‘자식은 어미를 버릴 뜻이 있으나 어미는 자식을 버릴 마음이 없는지라. 네가 떠나간 후 아침저녁으로 항상 슬피 눈물을 뿌렸으니 서글프고 괴롭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곡한 사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결단코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면 목련존자가 어머니를 구했듯이 반드시 큰 깨달음을 얻어 자신을 제도해 줄 것을 당부하며 만일 그렇지 못하면 큰 허물을 짓는 것일 뿐임을 지적하고 있다.
‘크게 버려야 크게 얻는다’는 옛말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출가한 스님이 누구보다 열심히 수행에 전념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실제 어머니의 뜻대로 마침내 선(禪)의 역사를 새롭게 개척한 대선사로 우뚝 섰던 것이다. 출가란 무엇이며,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하는 이 세 통의 편지는 현재 『치문경훈』에 전한다.
재가자가 세상을 살면서 현세에서 편안하고 행복하려면,
자신이 맡은 직업에 최선을 다해 스스로 생활을 이끌어야 한다.
재산을 잘 보호해야 한다.
착한 친구와 사귀어야 한다.
균형 있는 생활을 꾸려 나가야 한다.
(잡아함경)
무엇이건 빼앗아 가는 사람은 다음의 이유 때문에 해가 되는
사람으로 친구가 될 수 없다.
첫째, 그는 무엇이건 빼앗아 간다.
둘째, 작은 것을 빼앗고 큰 것을 바란다.
셋째, 상대방이 자신의 힘보다 클 때에만 같이 움직인다.
넷째, 또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만을 한다.
이러한 네 가지의 이유 때문에 무엇이건 빼앗아 가는 사람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아함경)
깃발을 보면 수레에 누가 타고 있는가를 알 수 있고 산너머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 불이 난 것을 알 수 있고 그 나라의
정치인을 보면 그 나라의 사정을 알 수 있고 그 남편을 보면
그 아내를 알 수 있느니라.
(잡아함경)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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