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서 부치는 선지식의 편지
13. 서산대사가 지리산의 제자에게
서산대사 필적
학이 춤추고 용이 잠자려 하면 반드시 산과 바다를 얻은 뒤에라야 뜻을 따라 자재(自在)롭게 될 것이네. 나도 멀리 금선(金仙: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목을 서산(西山)으로 빼었네.
봄바람이 지팡이를 높이 떨치어 천리의 걸음을 결정할 것이니, 혹 한가한 틈을 얻거든 찾아주기 바라네.
장부는 만세(萬世)를 논하되 일생을 논하지는 않는다네. 뜻이 있는 곳에는 또한 기운이 따르고, 기운이 있는 곳에는 천지와 귀신도 또한 따르는 것이므로 천지도 범부의 마음을 빼앗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일세.
차라리 죽을지언정 마음공부는 칠통(漆桶:무명)을 깨뜨리는 굳은 각오로 임해야 하네.

이 편지는 청허당 휴정 서산대사(1520~1604)의 답장 형식의 글이다. ‘두류자(頭流子)에게 답함’이라는 편지의 제목으로 보아 한 때 지리산에서 수행하는 대사의 제자일 듯하다. ‘두류’가 지리산의 옛 이름이고 대사가 실제 그곳에 머무르며 수행을 했던 까닭이다.
두류자가 대사에게 무엇을 물어봤는지 확실치는 않다. 다만 답장의 내용으로 보아 수행과정의 번민과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물어본 것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을 듯 하다.
어쨌든 이 짧은 글에는 대사의 기백과 포부, 그리고 후학들의 지도방법이 명확하게 나와 있다. 특히 말미의 도를 위해서는 죽을 각오로 달려들라는 간곡한 당부는 오늘날의 불자들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모든 것이 그렇듯 같은 말이라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마음 또한 달라진다. 이 말의 힘도 대사가 했기 때문에 더욱 힘이 있는지 모른다. 대사는 많은 이들이 평가하듯 해동의 불교가 서산으로 흘러들고 그 물줄기가 다시 서산에서 굽이쳐 나왔다고 할 정도로 한국불교사에 크나 큰 족적을 남긴 고승이다.
대사는 한 평생이 구법의 길이었고 교화의 길이었으며 구국의 길이었다. 어린나이에 양친을 잃고 이후 21세 때 부용 영관대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은 스님은 30세 되던 해에 승과에 합격하고 선교양종판사의 자리까지 올랐다.
억불 속에서 불교의 불꽃을 다시 지피려 노력했던 스님은 불교의 힘은 수행에 있다는 판단으로 옷 한 벌에 낡은 발우하나를 갖고 운수행각을 펼쳤다.
또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승병을 모아 구국의 횃불을 치켜든다. 힘없는 민중이 무참히 학살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은 오히려 불살생계를 자행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대사는 일생동안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입장에서 선과 교를 통합하려고 힘썼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사의 큰 업적은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는데 있다. 사명유정, 정관일선, 중관해안, 편양언기, 기허영규, 뇌묵처영 등을 비롯해 제자가 1000여 명에 이른다.
이중 정치적인 탄압을 딛고 수행과 교화에서 이름을 드높인 기라성 같은 인물도 70여 명에 이른다. 이는 제자를 향한 대사의 지극한 애정과 탁월한 교육방법, 그리고 온몸로 보여준 실천과 감화력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원효대사가 한국불교의 새벽, 보조국사가 한국불교의 한낮이라면 서산대사는 저녁하늘의 둥그런 해와 같다.
그리고 그 빛이 있었기에 500년의 긴 암흑기를 지나 오늘날 다시 불조의 혜명을 밝힐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 편지를 비롯해 대사의 여러 편지들은 『청허당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 정관 스님이 사명당에게
아아, 법이 쇠했는데 세상까지 극히 어지러워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승려들도 편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더욱 슬픈 일은 승려가 속인의 옷을 입고 군사로 몰려 나가 동서로 쫓겨 다니면서 혹은 적의 손에 죽고 혹은 속가로 도망치니, 속세의 습관이 다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출가의 본 뜻을 잊어버리고 계행(戒行)을 아주 폐하여 빈이름을 구하여 불처럼 달리면서 돌아오지 않으니 선풍(禪風)이 장차 그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환합니다.…
옛 성현들은 부귀를 뜬 구름 같이 보고 청빈의 즐거움을 고치려 하지 않으니 하물며 승려의 거취가 세속의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들으니 지금 왜적은 물러갔고 큰 공은 이미 이루었으므로 대궐에 나아가 사퇴를 청하기보다는 그냥 떠나버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원컨대 갑옷 대신 납의(衲衣)를 다시 걸치고 깊은 산에 들어가 반야의 산에 오르거나 자비의 배를 타고 곧바로 보리의 피안에 이르기를 바랍니다.승병 이끌었던 유정에게
수행에 전념할 것 강조
승병제도 부작용도 지적
조선중기의 선승인 정관 일선(靜觀一禪, 1533~1608) 스님이 사명당 유정(1544~1610)스님을 향한 일갈이다.
15세에 출가해 평생 가난을 벗하며 수행에 매진했던 정관 스님은 편양, 소요 스님과 함께 서산대사의 3대 문파를 형성했을 정도로 뛰어났던 인물이다.
이런 스님이 임진왜란의 영웅 사명당에게 편지를 써 이제 군복을 벗고 출가자의 본분에 전념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스님은 먼저 유정 스님이 ‘돌과 같은 마음과 소나무 대나무와 같은 절개가 있어, 검은 물을 들여도 검지 않고 갈아도 닳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럼에도 승려로서의 자리를 오래도록 떠나 있는다면 결국 세속에 물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잊지 않는다. 정관 스님의 입장은 단호하다. 전쟁이 끝났으니 당장 입산해 다시 불도를 닦으라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스님의 이러한 견해는 당시 승병 활동의 부작용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계율을 지키며 용맹정진해야 할 스님들이 전쟁터로 나가 수행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고, 그나마 돌아온 스님들도 세속의 물이 들어 수행이나 계율을 등한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스님은 승병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외적의 침략 앞에 맞서 싸우는 것이 과연 출가자의 본분인지에 대해서는 유정 스님과 엇갈린 시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정 스님이 선조의 명을 받고 강화를 맺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음을 한탄하며 ‘곧 바닷가로 달려가 전송하고 싶사오나 갈 수 없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돌아올 동안 내가 죽지 않으면 깃발을 돌리는 그날을 기다려 나아가 뵙고 축하드리겠습니다’란 편지를 보낸다.
또 스님은 관세음보살 전에 유정이 불가사의한 가피를 입어 적의 소굴에서 무사히 벗어나게 해달라며 올린 간절한 기도문은 정관 스님이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 잘 알 수 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경전 보급과 후학양성 등 다른 방식으로 현실에 깊이 참여했던 정관 일선 스님.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죽비 대신 칼을 쥐어든 사명당과 한평생 삼의일발(三衣一鉢)의 수행자로 살았던 정관 스님 중 어느 쪽이 바람직했는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국난 앞에서 민중의 고통과 승단의 정체성을 누구보다 많이 고민하고 아파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듯 하다.
이 편지를 비롯한 스님의 삶과 깨달음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은 현재 『정관집』에 전한다.
뉘우치면 곧 선(善)이 된다.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능히 뉘우치면 곧 선이 되나니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해가
세간을 밝게 비춤과 같다.
(법구경)
먹거리를 보시하게 되면
항상 창고가 가득 차게 된다.
육취윤회경(六趣輪廻經)
한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여쭈었다.
` 부처란 대체 무엇입니까? `
귀종화상께서 대답하셨다.
` 내가 그대에게 말해 준다 해도 그대는 믿지 않을 것이다.`
`큰스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
`그대가 곧 부처니라.`
`어떻게 그 길을 이룰 수 있습니까? `
`하나의 티끌이 눈을 막고 있으면 허공의 꽃이 어지러이
떨어지게 되느니라.`
(수심결)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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