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주 / DGIST
제18기 APCTP 과학커뮤니케이션 스쿨 참가 후기
ATP(adenosine triphosphate: 생명체의 주된 에너지원)는 들어 봤어도 APCTP는 처음이었다. 친한 교수님께서 소개해주신 APCTP 과학커뮤니케이션 스쿨 모집 공지를 보고 지원서를 바로 쓸 생각이 들지 않았던 이유였다. 사실은 겁이 났었다.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라니!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양자역학’에 대해서 글을 쓰고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매체를 통해 과학자와 대중을 연결하는 직업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예전에 양자역학 강의를 수강하면서 학을 뗀 지 오래였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양자역학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맛있는 저녁을 가족과 함께 먹고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에서 APCTP 과학커뮤니케이션 스쿨이 다시 생각났다. 약간의 행복함과 나른함은 자신감을 북돋우기에 아주 좋은 거름이었다. 지원 마감이 3시간 남은 시점이었다. ‘그래, 나는 할 수 있어.’ 지원서를 쓰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스쿨에 합격하게 될 미래의 나를 응원하면서 지원서를 완성했다.
말이 씨앗이 된다더니, 과거의 내가 했던 응원은 그리 머지않은 미래의 나에게 필요했다. 합격 메일에 기뻐할 새도 없이 다음 과제를 완성해야 했다. 양자역학을 주제로 대학 신입생 수준의 가상 독자를 위한 글이었다. 참고서적은 『김상욱의 양자 공부』.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책을 열심히 읽었지만, 내가 그 정도 수준의 글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슬퍼질 뿐이었다. 인터넷을 열심히 찾아보아도 자료 대부분이 김상욱 교수님의 감수를 거친 글이었다. 과제 제출 전날까지 꿈에서 한창 과제를 쓰는 꿈을 꾸다가 시간에 쫓기어 과제를 제출했다. 양자가 이중슬릿을 통과하는 상황을, 사람이 두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상황에 빗대어 글을 썼다.
과학커뮤니케이션 스쿨 중 학생들이 해내야 하는 과제는 양자역학을 주제로 글쓰기를 완성하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캠프에 오기 이전에 제출했던 과제를 글쓰기 수업을 듣고 첨삭을 거쳐 최종본을 제출해야 했다. 내게 글쓰기 교육을 해주셨던 김원규 교수님께선 내 글을 미리 읽어보신 분도, 내 글에 1차 첨삭을 해주신 분도 아니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 수업 초반에 해주신 한 마디는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었다. "여러분의 글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대다수 학생의 글이 『김상욱의 양자 공부』라는 참고도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글이란 것은 본인의 관점, 생각이 담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글은, 열심히 쓰긴 했지만 『김상욱의 양자 공부』에서 한 발자국도 더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제출 시한까지 2시간 남짓 남아있을 뿐이었지만, 글에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녹여내기 위해 글을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결국 마감 시간 1분 전에 최종 완성본을 제출할 수 있었다. 완성된 글은, 선택의 굴레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전자도 관측당하면 하나의 상태로 붕괴하는 것처럼, 선택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의견을 묻는 것 역시 자신의 선택을 구속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프레젠테이션 발표는 글쓰기를 하면서 생각해둔 ‘선택을 할 때 겪는 고민’을 발전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초학부를 다니면서 다양한 학문을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에 익숙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상태가 중첩되는 생각은 전자처럼 중첩된 상태라고 가정하자, 선택의 확률분포를 계산할 수 있는 파동함수 역시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추상적이었던 아이디어가 물리학과인 명진님의 도움을 받아 이론적인 토대를 탄탄히 다지고, 전자공학과인 승환님의 조언을 통해 가상의 기계장치로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는 기존에 출시된 AI 스피커와 비슷한 외형을 갖고 있지만, 선택지의 파동함수를 빠르게 계산할 수 있는 CPU와 계산 결과를 나타낼 수 있는 디스플레이를 장착한 기계 ‘퀀텀예보’를 고안해냈다. 작은 기계가 다차원 파동함수를 계산해낸다는 건 지금으로서는 당연히 허무맹랑한 얘기다. 하지만, 우리가 가정한 미래 상황에서 과학적 논리를 퍼즐처럼 맞춰 나가자 언젠가는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스스로 쓰고 말하면서 배운 과학커뮤니케이션뿐만 아니라 캠프 일정 내내 만나서 대화를 나눈 연사님들의 강연을 통해서도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선명한 눈빛과 뚜렷한 목소리로 양자역학에 관해 설명해주시던 김상욱 교수님의 모습은 ‘저 사람이 저렇게 좋아하는 저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을 통해 청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수식 하나 없이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에게 비직관적인 개념을 이해시키는 강의를 들으며 ‘내가 양자역학을 수강하기 전에 교수님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가장 뜻밖의 깨달음을 얻은 자리는 김상욱 교수님, 이은희 선생님, 이명현 선생님, SF소설인 「관내분실」의 김초엽 작가님과 함께한 Special Talk 자리였다. 실재를 탐구하는 과학과 허구를 구체화하는 소설이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 SF. 모순된 두 가지가 교차하는 곳에는 과학을 모르는 사람들도 끌어들일 수 있을 만큼 흥미롭고, 쉬운 설명과 작품 안에서 무너지지 않는 탄탄한 과학적 논리가 필요했다. 과학자들이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표 준비를 위해서 밤을 새워서 그런지, 스쿨 일정이 마무리되고 상을 받는 와중에도 모든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었다. 숨 쉴 틈 없이 바삐 채워진 스쿨은 2박 3일이었지만, 4박 5일의 일정을 마친 것 같은 여운을 남겼다. 지난 스쿨 동안 내가 배우고,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돌이켜보면 아마 일정의 바쁨으로 인한 여운만은 아닌 듯하다. 과학커뮤니케이터라면 누구나 선망할 만한 분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말씀 속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도 다 APCTP에서 좋은 기회를 마련해준 덕이었다. 친숙하지 않은 주제라서, 발표나 글쓰기에 자신이 없어서 APCTP 스쿨 참여를 주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후기를 읽고 마음이 바뀌었기를 바란다. 과학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도 할 수 있다’는 작은 응원만 있으면 누구든지 이 스쿨에서 자신만의 소중한 경험을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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