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서 부치는 선지식의 편지
15.사명당이 日 겐끼츠 스님에게
서역에서 온 한 가락 곡조를 일찍이 형들과 같이 불다가, 갑자기 헤어진 지 어제 같은데 두 번이나 봄과 가을이 바뀌었으니, 참으로 무정한 세월 번갯불처럼 빠르구려.
멀리서 생각하면 엔코우지(圓光寺)에서 노형(老兄)의 큰 법력으로 그 섬의 백성들을 구제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랍고 장한 일이오. 지난번 내가 선사(先師)의 명령으로 그대들의 나라에 가서 노형과 여러 스님들을 만나 임제(臨濟)의 선풍(禪風)을 담론했던 일들이 아직 생생하오.
당시 나의 소원은 우리 백성들을 모두 데리고 돌아와 ‘생명을 두루 구제하라’는 선사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었는데 그 원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와 매우 서운하였소.
나는 서쪽으로 돌아온 뒤로 몹시 병들고 쇠약하여 이내 묘향산에 들어가 스스로 분수를 지키면서 죽기를 기다렸더니 마침 그곳에 가는 사람이 있다 하기에 노형의 고요한 봄꿈을 깨우게 된 것이오.
부디 형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원으로써 대장군에게 아뢰어 우리 백성들을 모두 돌려보내도록 한다면 못내 다행한 일이겠소. 이 변변찮은 물건이나마 웃고 받아 주기를 바라며 이만 그치오.
입적하기 두 해전
왜장의 군사고문에게
간곡한 당부의 글 보내
이 편지는 사명당 유정(1544~1610) 스님이 입적하기 두 해 전인 1608년 봄 무렵에 쓴 편지다. 교토의 겐끼츠(元佶, 1548~1612) 스님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전쟁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사명당이 만년까지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일본으로 끌려간 10만 여명의 조선인들이 그들의 무자비한 칼날에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사람마저 노예로 전락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을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이런 까닭에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군사고문으로 그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는 겐끼츠 스님에게 조선인들을 돌려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는 당부의 글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명당하면 임진왜란을 떠올릴 만큼 그는 난세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심은 원래 중생을 구호(救護)하시기 위함인데 이에 도적이 심하여 백성을 함부로 해칠까 두려우니 내 어찌 앉아 있겠는가. 내 미친척 적진에 들어가 그들의 흉한 칼날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면 곧 자비의 가르침을 버리지 않음이라.”
수행에 전념하던 사명당은 전쟁이 일어나자 죽비 대신 칼을 들었다. 의병장 김덕령이 칭송했듯 공명심이나 국가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옳음’을 위해서였고, 더 많은 생명들을 살리기 위한 자비심의 발로였다.
사명당의 수많은 공적을 전해들은 선조는 “사명당이 환속할 경우 삼군을 통솔하는 장군으로 임명하겠다”고 권유했으나 그는 출가자로서의 길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오대산에서 정진하던 스님은 스승 서산대사의 입적소식을 듣고 묘향산으로 향하던 중 선조의 갑작스런 요청으로 일본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마도 사명당은 스승의 장례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소 ‘고통 받는 중생을 외면하지 말라’는 스승의 간곡한 당부를 잊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때가 스님의 나이 61세인 1604년. 노구를 이끌고 수만리 길을 떠난 사명당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담판으로 마침내 2년만에 조선인 3000여 명과 함께 귀국한다. 그러나 스님은 그곳에 남은 수많은 사람을 떠올리며 3000여 명이야 오히려 ‘빈손’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스님은 일생은 구도자, 전략가, 외교가, 시인의 다면불(多面佛)로 나타난다. 유독 스님과 관련된 신화적인 요소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도 그에 대한 백성들 애정과 감사의 마음과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출가자로서 칼을 잡았던 것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힘없는 사람들을 자신의 목숨보다 귀중히 여긴 스님의 생애와 사상은 후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스님의 편지는 『사명대사집』에 실려 있다.
16. 조선포로 일요 스님이 아버지에게
아버님의 편지를 열고 읽으려하니 감격의 눈물이 앞섭니다. 이는 하늘의 돌보심이며 신명의 도움이 아닐런지요. 주군을 찾아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간곡히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주군은 오히려 가신들에게 저를 견고히 감시할 것을 명령해 새장속의 새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조만간 하늘이 무심치 않아 소자가 귀국할 수 있다면 부모님께서는 잃었던 아들을 얻고 저로서는 잃었던 어버이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보내주신 편지를 조석으로 모셔 받들겠사오니 두 분께서도 이 아들의 편지를 자식 보듯이 대해 주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부모님을 뵙고 그동안 쌓였던 회한을 풀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부디 천수를 누리시어 평화로운 시대에 만날 수 있을 날까지 저를 기다려 주십시오.
전쟁만큼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공포, 굶주림, 생이별, 그리고 죽음…. 한국사 오천년간 그 어느 시대에 전란이 없었을까만 그 중에 가장 참혹한 전쟁 중 하나로 임진왜란을 꼽을 수 있다. 갑작스런 왜침과 그들의 학살로 수백만 명의 민중이 죽어갔으며, 약 10만명이 일본으로 끌려가는 생이별을 강요당해야 했다.
조선 포로였던 일요(日遙) 스님의 편지에는 전쟁의 참혹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꿈엔들 잊을 수 없는 고향, 그 고향 땅의 아버지에게 눈물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스님은 이 글에서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언젠가는 돌아갈테니 부디 기다려 달라는 당부의 말을 남기고 있다.
스님의 본명의 여대남(余大男). 그가 일본으로 끌려간 것은 13세 때인 1593년 7월이다. 그 해 6월말 천신만고 끝에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은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의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이 때 어린 여대남도 왜군에게 붙잡혀 죽을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고 했던가. 시퍼런 칼날 앞에서 소년은 땅바닥에 묵묵히 한시를 써보였다. 당나라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 803~852)의 시였다.
이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비범한 아이라는 생각에 죽이지 않고 일본으로 끌고 갔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것은 동시에 비극의 시작이었다. 79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다시는 고국땅을 밟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의지할 곳 없던 여대남은 어린 나이에 규슈 구마모토현의 혼묘지(本妙寺)로 출가해 ‘일요(니찌요우)’라는 법명을 얻는다. 스님은 그곳에서 열심히 수행 정진해 28세에 규슈를 대표하는 이 절의 주지로 발탁된다.
고향의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은 주지가 되고 10여 년이 흐른 뒤였다. 일본에 다녀온 한 관리로부터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식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편지를 쓴 것이다.
“내 나이 쉰여섯이고 너의 어미 나이 예순이 되었느니라. 넌들 오고 싶은 마음이 없으랴마는 네 몸을 네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처지를 이 아비는 아노라. 다행히 그곳을 빠져나와 고국에 돌아와 너를 만나게 된다면 30년 쌓인 한이 하루아침에 얼음처럼 녹아 없어지겠구나. 너는 이국땅에 있으니 부디 몸조심해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여라. 아들아, 꼭 한번 너를 만나보고 죽었으면 이 아비는 여한이 없겠노라.”
이 편지를 읽은 일요 스님은 그리움과 함께 통한의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온갖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의 절망감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중에 ‘쇼닌(上人)’이라는 존칭까지 얻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일요 스님. 스님이 아버지와 주고받았던 3통의 편지는 현재 혼묘지에 남아있다.
자신의 허물을 뉘우쳐라.
사람이 지옥한 악행을 지었어도
허물을 뉘우치면 차츰 엷어지나니
나날이 뉘우치길 쉬지 않으면
죄의 뿌리는 영원히 뽑히리라.
(증일아함경)
뉘우치면 곧 선(善)이 된다.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능히 뉘우치면 곧 선이 되나니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해가
세간을 밝게 비춤과 같다.
(법구경)
내 몸이 다하여 아끼고 치장하고 보살피지만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내 몸은 순간순간 허물어져 갑니다.
내 몸이 다하여 아끼고 치장하고 보살피지만
흙으로 돌아갑니다.
윤이 나던 머리카락과 새하얀 이빨
길고 도톰하던 손톱과 발톱 모두
한 줌 흙으로 돌아갑니다.
보드랍던 피부와 쇠심줄 같던 근육
강건하기만 하던 튼튼한 뼈대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갑니다.
내 몸이 다하여 아끼고 치장하고 보살피지만
물로 돌아갑니다.
행복에 겨워 흘리던 기쁨의 눈물도
슬픔에 겨워 흘리던 비탄의 콧물도
한 방울 물로 돌아갑니다.
맛있는 음식에 입 안 가득 고이던 침도
몸 안 곳곳을 부드럽게 적셔주던 진액도
한 방울 물로 돌아갑니다.
썩은 살에서 배어나던 피고름도
냄새나고 더러운 대변 소변도
한 방울 물로 돌아갑니다.
내 몸이 다하여 아끼고 치장하고 보살피지만
한 순간 온기로 돌아갑니다.
고운 이를 쓰다듬던 그 손길의 따스함도
미운 이를 증오하던 그 분노의 열기도
한 순간의 온기로 돌아갑니다.
내 몸이 다하여 아끼고 치장하고 보살피지만
한 점 바람으로 돌아갑니다.
거칠 것 없이 휘저으며 걷던 씩씩한 몸짓도
고아한 자태로 눈길을 끌던 우아한 몸짓도
한 점 바람으로 돌아갑니다.
내 몸이 다하여 아끼고 치장하고 보살피지만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한 방울 물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한 순간 온기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한 점 바람으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그렇게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고 난 뒤
나의 몸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내 몸이 다하여 뻗대고 자랑하고 지키려 애쓰지만
내 마음은 강가 돌멩이에 낀 누런 때와 같습니다.
밝고 어둡고 아름답고 추한 빛깔의 강,
그 강물의 때가 낀 자리가 나의 마음입니다.
고요하고 시끄럽고 솔깃하고 거슬리는 소리의 강,
그 강물의 때가 낀 자리가 나의 마음입니다.
향기롭고 지독하고 풋풋하고 비린내 냄새의 강,
그 강물의 때가 낀 자리가 나의 마음입니다.
달고 짜고 쓰고 매운 맛의 강,
그 강물의 때가 낀 자리가 나의 마음입니다.
부드럽고 거칠고 차갑고 따스한 감촉의 강,
그 강물의 때가 낀 자리가 나의 마음입니다.
이것과 저것, 옳고 그른 생각의 강,
그 강물의 때가 낀 자리가 나의 마음입니다.
아름답고 추한 빛깔의 때를 강으로 돌려보냅니다.
솔깃하고 거슬리는 소리의 때를 강으로 돌려보냅니다.
향기롭고 지독한 냄새의 때를 강으로 돌려보냅니다.
달고 쓴 맛의 때를 강으로 돌려보냅니다.
부드럽고 거친 감촉의 때를 강으로 돌려보냅니다.
옳고 그른 생각의 때를 강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렇게 온 곳으로 돌려보내고 난 뒤
나의 마음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원각경보안보살장)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 밀알가입은 hmwiwon@gmail.com (개인신상은 철저히 보호됩니다)
※ 군자금계좌: 농협 356-0719-4623-83안정주
※ 통합경전계좌 : 국민은행 901-6767-9263노영균sjm5505@hanmail.net
※ 투자금 계좌: 하나은행 654-910335-99107 안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