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 많고, 내용도 그리 흥미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판소리와 가야금병창으로 화려한 예술의 꽃을 피우다 돌아가신 박귀희 명창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본디 남자들만의 독무대이던 판소리계에 여성 명창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부터입니다.
신재효의 제자이고 대원군의 사랑을 받던 진채선이라는 명창이 나타난 이후로 이화중선 명창이 일제 시대에 대단한 인기를 끌자, 수많은 소녀들이 판소리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박녹주, 김소희, 박초월 명창과 더불어 판소리계에서 여성의 지위를 한껏 높인 박귀희 명창도 그런 소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1921년 2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태어난 오계화 소녀(훗날의 박귀희 명창)는 대구시 봉산동에 있던 외갓집에서 대구 공립보통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길 건너 작은 집에서 날마다 노래소리가 들려왔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 소리에 끌려 어린 기생들이 배우는 단가와 판소리를 귀동냥으로 익혔습니다.
어떤 때는 학교를 빠져가며 몰래 따라 배웠고, 반 년쯤 지나면서부터는 가까이 가서 큰 소리로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니 소리 선생인 손광제의 눈에 안 뜨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선생이 불러서 이름을 묻고 소리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인지라 귀동냥으로 익힌 <만고강산>이라는 단가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당장 외갓집에 찾아가서 명창 될 소질이 있으니 국악을 가르치라고 권했습니다.
선생은 그녀를 당대의 최고 여성 명창인 이화중선에게 소개시켰고, 그녀의 소리를 들어 본 이화중선 명창은 바로 입단을 허락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을 따라 순회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조선팔도는 물론이고 만주, 훈춘, 봉천까지 다녔어요. 물론 고생을 무척했지만 그때는 오로지 명창 되려는 생각에 참을 수 있었지요. 자나 깨나 명창 될 생각뿐이고, 꿈을 꾸어도 명창 꿈을 꿨어요. 닭을 먹을 때도 목소리에 좋다는 울대만 먹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명창 꿈에 부푼 소녀에게 떠돌이 창극단 생활은 차분히 공부할 시간을 마련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음해 여름, 공연이 없어서 단체가 쉬고 있을 때 고향으로 내려 가 대구의 용인사에서 조학진 명창에게 100일 공부를 하며 <적벽가>와 <춘향가>를 배운 뒤, 19살 때에는 김소희 명창과 함께 광주 지실마을에 살고 있는 박동실 명창을 찾아 가 <흥보가>와 <심청가>를 배우고, 21살 때에는 하동 쌍계사에서 임방울 명창과 함께 유성준 명창에게 <수궁가>를 배웠습니다.
이렇듯 틈틈이 연마한 솜씨를 인정받아 임방울, 박초월과 함께 ‘동일 창극단’을 조직했을 때에는 주인공 역할을 도맡아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가 굵고 낮은 탓에 흥보나 이도령과 같은 남자 역할을 가끔씩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뒷날 여성 국극단을 탄생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해방 전에 일본에 레코드 취입하러 갔을 때에 ‘송죽가극단’이라고 하는 여자들만으로 만들어진 단체 공연을 구경했는데 기가 막히게 잘해요. 연기며 의상이며 노래며 춤이며 나무랄 데가 없고, 관객들의 반응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도 저런 단체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남자들하고 단체 생활을 하다보면 연애를 하고 애기를 낳아서 애기까지 끌고 다니는데, 여관의 좁은 방에서 애기 기저귀 널어놓고 복작거리는 생활이 지겹다 못해 환멸감까지 느낄 지경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오랫동안 여자들만으로 만들어진 창극단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해방 뒤에 박녹주 선배하고 상의했더니 대뜸 좋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김소희, 임유앵, 임춘앵, 김경희씨와 함께 '여성 국악 동우회'를 만들었는데 뜻밖에 관중들의 반응이 좋았어요.”
1949년 2월에 김아부가 쓴 <햇님 달님>을 서울의 시공관에서 공연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놀라운 인기를 끌었습니다. 햇님 왕자는 박귀희, 달님 공주는 김소희, 햇님 아버지를 박녹주가 맡아서 했는데 우리나라 처음으로 여성들만 출연하는 창극인데다 의상과 무대장치가 화려하다보니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공연장의 유리창이 수없이 부서졌습니다. 부산의 공회단에서 공연을 할 때는 임신 열 달째가 된 부인이 사람들 틈에 끼어 빠져 나가지 못해 그 자리에서 해산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젊은 처녀들이 햇님 왕자를 만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통에 변장을 하고 달아나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인기 덕에 “돈을 가마니에 쓸어 담을 만큼” 많이 벌자 수많은 여성 국극 단체들이 생겨나서 야담이나 전설들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6.25이후로 여성 국극은 점점 인기를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할 때는 궁녀 한 사람이라도 창을 잘 하고 잠깐 나오는 엿장수 한 사람이라도 소리 실력도 있고 연기도 좋아서 손님들이 좋아했는데, 단체가 많아지다 보니까 한 단체에 두세 사람만 소리를 잘하고 나머지는 소리 들을 맛도 없고 연기 볼 맛도 없고, 아마 그래서 손님이 떨어진 것 같아요.”
그녀는 판소리를 주로 닦아 온 명창이었지만 가야금 가락에 판소리 한 대목씩을 얹어서 부르는 ‘가야금 병창’에도 명인의 경지에 이른 솜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솜씨 때문에 1971년에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을 때는 곤혹스러운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지정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판소리로 해야 될지, 가야금 병창으로 해야 될지 한동안 말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가야금 병창을 하는 사람은 드물고 귀하니까 그 맥을 잇는 의미에서 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가 됐지요.”
그녀가 가야금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살 무렵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선생은 강태홍 명인이었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가야금에 깊이 빠져 들었습니다. 그 뒤 창극단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가야금 병창의 일인자이며 창극계의 명배우로 알려진 오태석 명인에게 열심히 가야금을 익혔기 때문에 어느덧 그녀의 솜씨는 스승의 법통을 이어받은 유일한 후계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 길로 가려고 태어났는지 어려서부터 뭐든지 배우면 남보다 빨리 익혔어요. 하나를 배우면 그 다음 것까지 알아낼 정도였으니 선생님들이 모두 놀라면서 귀여워해 주셨지요.”
그녀는 제자 복이 많아 재능이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현재 판소리계 최고의 프리마돈나인 안숙선 명창도 그의 제자요, 연극과 마당놀이와 뮤지컬을 오가며 눈부신 재능을 발휘하는 배우 김성녀도 그의 제자요, 강정숙·오갑순 등은 그녀의 법통을 이어받은 가야금 병창의 명인이요, 박범훈·김덕수 등 국악계의 리더로 활약하고 있는 명인들도 그녀의 제자입니다.
게다가 재복도 많아서 대부분의 국악인들이 말년을 가난하고 불우하게 보내는 데 비해서 그녀의 말년은 윤택하고 풍요로웠습니다.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 전통 한옥식 여관인 ‘운당여관’의 여주인으로서 그녀의 경제력은 국악계의 어느 누구보다도 탄탄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재산을 1960년대에 박헌봉, 박초월 명창 등과 함께 설립한 '국악예술학교'를 위해 쾌척한 일로 국악인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녀는 후진들을 가르치고 국악계의 어른으로서 바쁜 말년을 보내다가 1993년 7월 14일에 이 세상을 떴습니다.
박귀희 명창은 저의 스승인 박초월 명창을 언니라고 부르며 각별하게 지낸 사이여서 저는 스승을 따라 그녀의 공연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가야금 병창을 할 때면 판소리로 익힌 목 성음과, 창극을 하면서 익힌 몸짓과, 가야금으로 익힌 우아함이 서로 어우러져서 잠시도 관객의 한 눈을 팔지 못하게 했습니다.
쪽진 머리에 산호잠을 찌르고 화문석을 깐 무대에 앉아, 무릎에 가야금을 올려놓고 어깨춤을 추며 손으로 가야금 줄을 희롱하는 그 몸짓은 너무도 화사하고 흥겹고 교태가 흘러넘쳤습니다.
그녀가 가야금을 안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 사랑과 이별로 얼룩진 한 많은 세월이 어느 새 화사하고 밝고 아름다운 꿈의 세월로 변하고 마는 느낌을 받았던 나는 위대한 예술의 힘에 그저 놀라고 감탄하고 도취할 뿐이었습니다.
출처:
https://dreamnet21.tistory.com/346?category=165532 [김명곤의 세상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