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사건은 세계 권력으로서의 미국의 우월한 지위에 느낌표를 찍은 사건이었다. 이미 주요 경제 강대국이자 강한 정치권력이 되어가고 있던,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젊은 국가는 이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과학의 리더가 되었다. 45세의 엔리코 페르미는 그 선봉에 서 있었고, 그의 새로운 조국의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었다. 페르미의 이탈리아 동료가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듯이, 페르미는 대문자 F로 시작하는 물리학자가 되었다(이탈리아어로 물리학자는 fisico이다).
페르미는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물리학자는 아니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오펜하이머가 단연 출중했다. 그렇다고 페르미가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사람도 아니었다. 고등학술연구소에 자리를 잡은 아인슈타인은 전 세계적으로 과분한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수많은 이민자를 품은 도시 시카고는 페르미가 시카고의 자랑이라고 주장했다. 시카고의 신문들은 그를 칭송했고 다른 언론 매체들도 그의 위업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미국인들은 여전히 핵에너지의 미스터리를 감당하지 못해 휘청거리고 있었다. 이 복잡한 내용들을 일반인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스마이스 보고서가 작성되었지만, 폭탄의 역사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평화 목적을 위한 핵에너지 사용에 관한 내용을 일반인들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가장 대중적인 매체가 동원되었다. NBC 방송 네트워크는 <산 자와 죽은 자The Quick and the Dead>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원자력 에너지의 위험성과 전망을 설명했다. 제목이 마냥 편안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다큐멘터리의 진행자는 편안한 사람이었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코미디언 밥 호프와 낯익은 배우들이 등장하는 이 4주짜리 미니시리즈에 시청자들은 귀를 기울이며 한껏 집중했다. 리제 마이트너 역은 유명한 배우 헬렌 헤이즈가 맡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페르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는 정치인도 우상도 아니었지만,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영 불편해했던 페르미는 이런 기회를 피하고 싶었다. 1938년 노벨상을 받을 때에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싫었고 화려한 이벤트와 이후 이어지는 일련의 행사들도 싫어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엔리코는 넘치도록 상을 받았고, 영예를 얻고, 메달을 받았다. 그는 우아하고 겸손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폭탄 투하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토론회에 계속 불려 나가면서, 앞으로 핵에너지를 어떻게 규제하고 활용할 것인지에 열띤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런 자리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지만, 한껏 높아진 그의 명성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느 정치가의 말대로 원자폭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래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도저히 달아날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일반 대중의 마음속에 스타 과학자로서의 인상이 뚜렷이 남았지만, 페르미는 어린 학생들, 이제 막 학계에 발을 들인 신참들, 그리고 학계의 신성들에게 ‘페르미 그 자신’으로서도 존경을 받았다. 페르미와 겨룰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르침을 얻기 위해, 가야 할 길을 묻고 영감을 받기 위해 그를 찾았다. 4년 전 시카고대학교 스쿼시 코트에 모였던 사람들이 목격한 페르미를 이제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페르미가 얻은 명성 중 일부는 세상이 바뀌고 물리학 역시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20세기 초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같은 이론이 혁명을 일으켰던 시대는 굉장히 멋졌지만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실험과 이론이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을 해야 하는 시대였고, 하나의 현상을 거시적, 미시적 규모에서 심층적으로 조사하여 단서를 찾고 해석해야 했다. 이러한 과학적 노력의 취지는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고 그로써 더 큰 생각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부의 연구비는 전례 없는 수준으로 흘러넘쳤고, 이 돈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열심히 고민을 해야 했다.
페르미는 변화하는 상황을 정확하게 감지했고 이 변화의 흐름이 자신의 태생적 성향과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리학에 대한 그의 공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알 수 없는 것으로의 도약이 아니었다. 중성자 포격의 경우, 그는 그저 견고한 핵을 꿰뚫을 수 있는 발사체를 찾고 있던 것뿐이었다. 페르미의 약한 상호 작용 이론도 베타붕괴에서 사라지는 에너지에 대한 실험적 의문을 양자장이론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찾다가 나온 것이었다.
페르미는 자신이 혁명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전진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고 믿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1911년에 알파입자를 얇은 금박 포일에 쏘다가 알파입자가 튕겨 나오는 것을 관찰하고 원자핵을 발견했다. 제임스 채드윅은 좀 더 강력한 빔을 이용해 1932년 중성자의 정체를 밝혀냈다. 1930년대 말 사이클로트론이라 불리는 강력한 입자가속기가 개발되면서 핵물리의 최전선이 좀 더 앞으로 밀어붙여졌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 기계 때문에 물질을 좀 더 작은 규모에서 탐색할 수 있게 되었고, 핵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중성자와 양성자를 핵 안에서 붙들고 있는 알 수 없는 힘의 본질을 밝히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었다.
페르미는 물리학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접근해 나갔다. 그리고 그덕에 페르미는 그가 젊은 시절 존경했던 그 어떤 위대한 이론물리학자들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제 물리학은 실험을 통해 미래를 들여다보려 하고 있었고, 페르미는 실험과 이론 모두에서 위대한 성과를 이룬 유일무이한 물리학자였다.
시카고대학교에서 최초의 원자로 실험 4주년을 기념한 모임. 수많은 핵심 물리학자가 참석했다.
앞줄 왼쪽부터 엔리코 페르미, 월터 진, 앨버트 와튼버그, 허버트 앤더슨. 가운데 줄 왼쪽부터 해럴드 애그뉴, 윌리엄 스텀, 해럴드 리히텐버거, 레오나 우즈 마셜, 레오 실라르드. 뒷줄,왼쪽부터 노먼 힐베리, 새뮤얼 앨리슨, 토머스 브릴, 로버트 노블즈, 워런 나이어, 그리고 마빈 윌크닝. 1946년 12월 2일. | Emilio Segrè Visual Archives (ESVA)/Digital Photo Archive, Department of Ener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