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집>‘제사’ 글제 나오자 백지 답안지 낸 다산.홍낙안의 서학모임 처벌 요구에도... 정조 다산 답안을 2등 올려
글쓴이 :
게리
남인 벼슬길 다시 열렸는데… ‘제사’ 글제 나오자 백지 답안지 낸 다산
<23> 정미반회사건의 앞과 뒤
#1 중인 김석태의 집에 틀어박혀 천주교 교리 공부하는 모임을 절친 이기경이 불쑥 찾아와 다산 등을 타일렀지만 요지부동 #2 며칠 뒤 과거에서 백지 답안 제출 이기경은 다시 다산을 찾아갔지만 다산은 아예 만나주지도 않아
은거의 꿈
1786년 12월 22일, 정조가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을 다시 서용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정국에 미묘한 변화가 읽혔다. 임금은 탕평의 구상을 내비치며 채제공을 불러들였다. 노론 벽파의 일방통행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이기도 했다. 해가 바뀌어 1787년이 되었다. 1월에는 강계도호부사로 나갔던 장인 홍화보가 서울로 호출되었다.
다산은 1월 26일과 3월 14일의 반제(泮製)에 합격했고, 3월 15일에는 주장을 펴는 전(箋) 부문에서 수석을, 교훈을 담는 잠(箴) 방면에서는 차석을 차지했다. 이때 다산은 거의 1인 2역인 상태였다. 시험 준비하랴, 천주교 모임을 주도하랴 바빴다. 운 좋게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마음이 불안했다. 과거 시험에 대한 회의가 자꾸 짙어졌다.
장인 홍화보가 이즈음 사위 다산에게 매산전(買山錢)을 내렸다. 생활의 근거로 삼을만한 땅을 사서 경제적 자립을 하라는 뜻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다산은 은거에 대한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4월 15일, 큰 형수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초천에 내려간 길에 다산은 형 정약전과 함께 양평의 문암(門巖) 쪽으로 땅을 보러 갔다. 문암은 벽계(檗溪)의 남쪽에 있었다.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지 다산은 산장과 그에 딸린 땅을 매입했다. 산장이래야 세 칸 초가집이었다.
구리개의 소룡동 시절
4월 25일에 아버지 정재원이 사도시(司導寺) 주부(主簿)로 임명되더니, 바로 한성부 서윤(庶尹)으로 옮겼다. 채제공과 장인을 이어 남인들의 정계 진출에 속도가 붙고 있었다. 정재원은 5월에 소룡동(小龍洞)에 새 거처를 마련해 다산 내외를 불렀다. 다산은 ‘소룡동의 집으로 옮기며(就龍洞居)’란 시의 주석에서, “5월에 아버님이 사도시 주부가 되어 다시 서울에 집을 샀는데 나의 뜻이 아니었다”고 썼다. 자신은 문암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아버지 뜻을 따랐다는 의미다.
정재원으로서는 은거를 꿈꾸는 아들을 곁에 붙들어 둠으로써 대과 준비에 계속 매진케 하는 동시에, 여전히 천주교에 깊숙이 관여된 아들을 감시하려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소룡동은 오늘날 종각에서 명동 쪽으로 가는 중간 을지로 입구 어귀에 있던 동네였다. 이곳의 나지막한 고개는 황토라 땅이 질었다. 멀리서 보면 구리빛이 나서 동현(銅峴), 즉 구리개라 불렀다.
이 시절 다산의 모순적 정황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남아 있다. 이기경이 ‘벽위편’에 남긴 증언이다. “정약용이 구리개(銅峴)에 살 때 일이다. 이웃에 한 중인이 있었다.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은 아들을 가르쳐달라고 청했다. 성품이 자못 총기가 있고 지혜로워서 정약용이 이를 몹시 아꼈다. 근처에 산지 한 달 만에 마침내 책 한 권을 가르쳤다. 하지만 아침과 저녁에 밥 먹으러 제 집에 갈 때는 그 책을 가지고 가지 못하게 했다. 그 사람은 대궐 안의 여러 잡무를 맡아보는 액정서(掖庭署)의 아전이었다. 마침내 그 아들에게 틈을 타서 배우는 책을 가져오게 했더니, 바로 사서(邪書) 즉 천주교 책이었다. 그 책이 위로 임금의 귀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정약용이 또한 오래도록 벼슬길에 들지 못하였다.”
당시 다산은 과거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그 와중에 이웃 중인의 자식에게 천주교 교리서를 가르치고 있었다. 정조는 다산이 천주학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
깊어지는 고민
다산은 1787년 8월 21일 반제에 합격했고, 8월 24일에는 중희당에 입시해 정조를 뵙고 ‘병학통(兵學通)’을 상으로 받았다. 이때 정조가 자신을 무장(武將)으로 키울 뜻을 비추자 다산은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할 결심을 더욱 굳혔다. 다산의 급제가 자꾸 늦어지자 정조는 장인인 홍화보와 나란히 그를 무반으로 키울 궁리까지 했던 모양이다.
당시 다산은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천주교 신앙 문제로 가득 차있었다. 다산은 과거와 교회 일에서 도피하듯, 9월 초순에 가을걷이를 핑계로 문암 산장으로 갔다가 근 한 달 만에 돌아왔다. 은거의 결심을 굳히자 준비가 필요했다. 11월 17일의 황감제(黃柑製) 특별 시험에는 답안조차 제출하지 않았고, 12월의 반제에서는 형편없이 낮은 등수를 받아 한 번 더 임금을 실망시켰다. 마음이 온통 콩밭에 가 있었다.
당시 이승훈은 처남인 다산 형제와 더불어 난동과 반교 두 곳에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본격적인 천주교 교세 확장과 자체 스터디에 돌입했다. 교단 내부에서 가장 시급하게 생각한 일은 천주교 교리에 정통한 지도자 그룹의 양성이었다. 지도자급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일도 소홀할 수 없었다. 잇달아 이어진 모임은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선연(善緣)이 악연으로
이기경(李基慶ㆍ1756∼1819)은 다산의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다. 둘은 시험을 볼 때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합격자 명단을 보면 이기경이 수석을 차지하고 다산은 4등을 받았다. 또 다산이 수석을 차지하고 이기경이 후순위로 밀린 성적표도 실물이 남아있다.
이승훈과 다산은 이기경에게 전부터 서학 공부를 열심히 권해왔었다. 1784년 봄에 이기경은 다산에게서 이승훈이 구입해온 서양 서적에 대해 들었다. 호기심이 동한 이기경이 그 책을 보자고 했고, 다산은 이기경에게 ‘천주실의’와 ‘성세추요(盛世蒭蕘)’를 빌려주었다. 둘은 만나기만 하면 이 책에 대해 토론했다. 이기경은 서학서를 베껴 나름대로 정리한 별도의 노트를 가졌을 정도였다. 을사년 추조적발 이후 금령(禁令)이 내리면서 이 일을 멈췄다.
1787년 10월쯤, 이승훈과 다산 등이 천주학을 다시 숭상한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기경은 슬쩍 떠볼 생각으로 이승훈을 만났을 때, 서양 서적을 빌려달라고 했다. 이승훈이 말했다. “믿어야지, 보기만 해서야 무슨 소용인가?” “알아야 믿을게 아닌가. 좀 빌려봄세.” 며칠 뒤 이승훈은 필사한 ‘진도자증(眞道自證)’ 3책을 가지고 와서 하루 밤을 자고 갔다. 이기경과 정미반회사에 얽힌 세세한 이야기는 ‘벽위편’에 실린 이기경의 ‘초토신(草土臣) 이기경상소’에 자세하다.
교리 공부의 현장
열흘쯤 뒤인 11월 초쯤 이승훈과 다산 등이 반촌의 공부 모임에 이기경을 초대했다. 이기경이 수소문해보니 반촌 사는 중인 김석태의 집에 틀어박혀 성균관 식당에는 들르지도 않고 천주학 책만 보고 있다는 풍문이 파다했다. 이기경은 예고 없이 불쑥 김석태의 집을 찾아갔다.
이승훈과 다산, 그리고 진사 강이원(姜履元)이 의관을 정제하고 마주 앉아 있었다. 방에 들어서는 이기경을 보더니 이들은 주섬주섬 책상 위의 책과 물건을 치웠다. 당황했던지 건네는 말에 두서가 없었다.
“자네들 무얼 하고 있던 겐가? 설마 서학 책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 테지?”
다산이 이기경의 말허리를 잘랐다.
“무슨 소린가? 과거 시험 준비를 위해 변려문을 짓고 있었네.”
“지은 글을 보여주게.”
다산이 다시 당황했다.
“이제 막 시작한 참이라, 보여줄 만한 게 없네.”
“그래도 한번 보세.”
마지못해 내놓은 몇 장의 종이쪽은 글이라 할 것도 없는 메모에 가까웠다.
“자네들 왜 이러나? 자네들 솜씨로 이게 말이 되는가? 제발 그만들 하시게. 소문이 밖에 쫙 퍼졌네 그려. 대체 천주학이 무에 그리 좋은 게 있어서, 이렇게까지 하신단 말인가?”
꿀 먹은 벙어리 몇이 그의 말을 들었다. 이기경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며 구슬려도 보고, 윽박지르기도 하다가, 이들이 시치미를 떼고 종내 딴청을 부리자 마침내 화를 벌컥 내고 나갔다.
이승훈, 답안 제출을 거부하다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일이 있고 며칠 뒤인 11월 17일에 제주에서 진상한 귤을 나눠주며 특별히 시험을 보는 황감제(黃柑製) 과거가 열렸다. 내걸린 제목은 ‘한나라 분유사(枌楡社)’에 관한 것이었다. 한고조(漢髙祖)가 분유(枌楡), 즉 느릅나무를 한나라 사직단의 신주목(神主木)으로 정하고 이곳에 봄 2월과 납월에 양과 돼지로 제사 지내게 한 고사를 가지고, 국가의 제사와 관련해서 써야 하는 글이었다.
이승훈은 문제를 받아 들더니 굳은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고 팔짱을 낀 채 답안지에 한 구절도 쓸 생각이 없었다. 이기경이 어째 그러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 자못 놀라웠다.
“천주학에서는 천주 외에 다른 신에게는 제사를 지내지 않네.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을 뿐 아니라, 이 같은 글을 짓는 것조차 큰 죄가 된다네.”
이승훈은 끝내 한 글자도 안 쓴 채 과거장을 나왔다. 과거 시험 때마다 자신이 받은 등수와 채점관의 이름까지 꼼꼼하게 기록해둔 정약용의 연보에도 이날 황감제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다. 다산 또한 이날 이승훈과 마찬가지로 백지 답안지를 제출했던 것이다.
이승훈의 태도에 경악한 이기경은 그날 밤 이승훈과 함께 자면서 그러지 말라고 나무랐다. 이승훈은 생각을 바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다산이라도 타일러 보려고 이후 이기경은 두 차례나 따로 더 다산의 집을 찾아갔다. 다산은 그를 따돌리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홍낙안의 서학모임 처벌 요구에도... 정조 다산 답안을 2등 올려
<24>회유와 협박
말이 퍼지자 일이 커졌다
이기경은 반회에서 자신의 지적 이후 이승훈과 다산 두 사람이 보여준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자리에 함께 했던 진사 강이원이 사람들에게 이승훈과 같이 읽은 서양책 이름과 천주학을 공부하는 절차에 대해 얘기하고 다녔다. 공부를 한 것이지 서학을 믿은 것이 아니란 취지였을 것이다.
성균관 진사였던 홍낙안(洪樂安ㆍ1752∼1812)이 강이원에게서 이 이야기를 먼저 듣고, 이기경에게 사실 관계를 따져 물었다. 이기경이 당시의 정황을 얘기하며, 걱정스럽다는 뜻을 피력했다. 성균관 내부에서 말이 점차 눈덩이처럼 불어나, 모이기만 하면 이 일로 수런거렸다.
이승훈과 다산 쪽도 가만있지 않았다. 이기경이 과거 시험장에서 라이벌인 자신들을 모함해 이름을 다투려 한다고 선제공격을 했다. 그 결과 이기경은 12월 초에 있었던 응제시(應製試)에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홍낙안은 1787년 12월에 이기경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번 만나 얘기를 듣고 나서 마음속에 큰 근심이 자리 잡았다며, 결코 좌시할 수 없으니 함께 상소를 올려 이들을 징치하자고 주장했다. ‘벽위편’과 ‘동린록(東麟錄)’ 등에 수록된 홍낙안의 편지 한 대목은 이렇다.
“저들은 소굴이 이미 이루어졌고, 사설(邪說)도 유행하고 있으니 드러내놓고 절실하게 타이르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소. 임금 앞에 나아가 들은 것을 한차례 아뢰지 않고는 비록 우리가 입술이 타고 혀가 마르도록 애써봐야 그저 한 차례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뿐일 것이오.”
난처한 이기경과 난감한 다산
이기경은 입장이 난처했다. 무엇보다 한때 자신이 이들과 어울려 천주교 책을 본 전력이 있었던 것이 켕겼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이기경 또한 서교(西敎) 이야기를 즐겨 들었고, 손수 책 한 권을 베껴 썼다”고 쓴 바 있다. 다산과 이승훈은 자신의 오랜 벗이었다. 벗의 등에 칼을 꽂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막상 이들이 내놓고 문제 행동을 한 것도 없었다.
이기경은 홍낙안에게 보낸 답장에서 “다만 이들이 지금은 비록 스스로 귀굴(鬼窟)에 빠져들어 스스로 양심을 던져버렸지만, 그 평소의 관계로 보면 모두 지극히 친밀한 사람들이다”라고 하며, 이들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기는커녕 도리어 의심을 일으켜, 자신을 모함해 과거 응시자격을 정지당하게 한 사실을 말하고, 내년 과거에도 일체 응시하지 않음으로써 저들에게 자신이 결코 다른 마음이 없음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맥없는 답장을 보냈다. 공론화가 자신에게도 결코 이로울 수 없음을 이기경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홍낙안이 다시 편지를 보내 이기경을 다그쳤지만 이기경은 더 이상 답장하지 않고 침묵 모드로 들어가 버렸다. 일이 점점 번져가자, 사실 난감해진 것은 다산이었다. 그저 있자니 소문이 자꾸 커져가고, 행동을 취하자니 긁어 부스럼이 될 가능성이 컸다. 다산은 자신이 이기경을 따돌려 만나주지 않았던 초기 대응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이기경에게 달래고 회유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 편지는 ‘벽위편’에만 실려 있고, 정작 다산의 문집에는 빠지고 없다.
버리지도, 버릴 수도, 버려서도 안 된다
다산이 이기경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본다. 수록 전문을 읽는다.
“근일의 일은 차라리 잠들어 깨어나지 말았으면 싶군요. 첫 번째는 이 아우의 죄이고, 두 번째는 형의 잘못입니다. 제가 비밀스런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남을 잘못 믿어 일처리를 그르쳤으니 제 죄를 알겠습니다. 형께서 하루도 기다리지 않고 전혀 다른 의미로 남을 잘못 알았으니, 허물이 없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와서 형은 나를 절대로 버리지 못하고, 또한 버려서도 안 되며, 감히 버리지도 못하리이다. 이 세 가지가 있고 보니, 내가 또 차마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선을 권면한다는 것은 형의 그럴싸한 명분이고,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임은 저의 고상한 태도겠지요. 만약 물이 흘러가고 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언덕 위에서 구경하던 자들은 틀림없이 ‘이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한 우정이다’라고들 할 겝니다. 한번 형께서 쪼개어 둘로 만든 뒤로부터 패공(沛公)의 좌사마(左司馬)가 하나뿐이 아닐 테니, 어찌 유감스럽지 않겠습니까? 다만 형에게 한마디만 부칩니다. 형께서 저를 입으로 끊고, 제가 형을 입으로 끊음은 ‘반회(泮會)’란 두 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감동함을 입게 해주신다면 전날과 같이 즐거울 것이니 죽더라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이만채가 엮은 ‘벽위편’에 수록된, 다산이 이기경에게 보낸 편지 전문.)
돌려 말한 다산의 말뜻은 이렇다. ‘이번 일은 내 죄와 너의 잘못이 반반이다. 내 죄는 너를 믿고 모임에 잘못 끌어들인 것이고, 네 잘못은 남을 엉뚱하게 모함해서 구석으로 내몬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너 또한 떳떳치 못하다. 너는 나를 버려서도 안 되고, 버릴 수도 없고, 감히 버리지도 못한다.(不必棄, 亦不可棄, 亦不敢棄.) 이 상태에서 서로 없던 일로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 네가 시작한 전쟁이니 네가 끝내라. 그리고 우리 둘의 기억 속에서 ‘반회(泮會)’란 두 글자를 지워 버리자. 네가 내 뜻을 따라준다면 예전의 우정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삼불기론(三不棄論)’을 편 것인데, 말은 온건하게 했지만 사실은 협박에 가까웠다. 이 편지는 앞뒤가 잘린 발췌다.
젊은 날의 다산은 혈기가 넘쳤고, 단도직입적이었다. 돌려 말하지 않고 구차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또래 그룹의 리더였고, 행동대장이었다. 직선적이고 구차하지 않은 다산의 성격과 행동은 훗날 다산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하고, 위기에서 건져내기도 했다.
홍낙안의 직격
이기경의 미온적 태도에 실망한 홍낙안은 그저 물러서지 않았다. 칼을 확실하게 뽑아야 할 시점으로 판단했다. 해가 바뀌어 1788년 인일(人日), 즉 1월 7일에 인일제(人日製) 과거가 열렸다. 홍낙안은 답안으로 제출한 대책문(對策文)에서 ‘서양에서 흘러 들어온 일종의 사설(邪說)이 점차 타오르는 형세에 있음’을 들어 실명만 거론하지 않았을 뿐 정약용과 이승훈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유명묵행지배(儒名墨行之輩)’ 즉 겉으로는 유학을 하는 체 하면서 실제 행실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 같은 이단을 행하는 무리들을 정조준해서 나라의 장래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목청을 한껏 높였다. 그리고 그들이 을사년 봄과 1787년 여름의 사건에서 이미 그 단서가 드러났다고 했다.
을사년 봄 사건은 명례방 추조적발사건인데, 1787년 여름의 사건은 그 내용이 궁금하다. 다산이 1787년 4월 15일에 부친과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 쓴 시 ‘파당행(巴塘行)’에 묘한 대목이 있다. “이때 부친을 모시고 초천으로 가다가 밤에 당정촌(唐汀村)에서 묵어 잤다. 이때 와언(訛言)이 크게 일어나 시골 마을이 소란스러웠다.” 또 그 시 중에 “적병 온단 말만 하고 적병은 보이지 않아, 정한 방향 없이 가니 바람 맞은 나비일세(但道兵來兵不見, 去無定向如風蝶)”라고 한 내용이 있다. 반란이 일어나 역도들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한다는 풍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관청에서 군대를 점호하고 법석을 떨자 온 마을이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광경을 묘사했다.
이 사건은 앞서 제8화에서 잠시 소개한 제천의 김동철이 정감록 신앙을 유포하다 복주된 사건을 가리킨다. 을사추조 적발사건과 김동철 정감록 역모 사건을 나란히 둔 것으로 보아, 정감록 신앙이 서학과의 연장선상에서 위천주(僞天主), 즉 재림 예수의 코드로 인식된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한번 살피겠다.
홍낙안의 직격탄으로 다산의 1785년 봄 을사추조 적발 사건과 1787년 여름의 김동철 모반 사건, 그리고 겨울의 정미반회사가 공론의 수면 위로 다시 한번 떠올랐다.
무거운 은혜
다산은 홍낙안과 함께 인일제 과거에 응시했다. 근신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도 놀라웠다. 인일제에서 다산은 지차, 즉 2등으로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1788년 1월 7일자 기사에 그 성적이 나온다. 같은 날 홍낙안이 다산을 처벌하라는 답안을 공개적으로 작성했고, 임금은 그 글을 읽은 상태에서 다산의 답안지를 높은 등수로 올렸다. 개의치 않는다는 확실한 의사 표시였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한방이 허공만 갈랐다. 홍낙안은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다산은 ‘인일에 희정당에서 임금을 뵙고 물러나와서 짓다(人日熙政堂上, 謁退而有作)’란 시에서 “부족한 나 무거운 은혜를 입어, 머물게 해 돌아보심 내리셨다네(疎逖承恩重, 淹留賜顧頻)”라고 썼다. 제목 옆에 ‘이때는 대책 때문이었다(時因對策)’이라고 썼다. 자신이 쓴 대책의 답안지를 보고 임금이 특별히 불러서 칭찬했다는 의미다.
임금은 이 자리에서 다산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동안 지은 책문이 몇 수인가?”
“20수입니다.”
더 분발하라는 무언의 암시였다.
다산이 다시 큰 물의를 일으킨 직후, 정작 문제를 제기한 이기경은 제풀에 위축되어 과거를 포기했고, 다산은 홍낙안이 자신을 저격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당히 그 자리에 나아가 답안을 제출했다. 임금은 다산에게 높은 등수를 허락해 다산에게 칼끝을 겨눈 홍낙안의 대책문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다산은 임금의 이 같은 태도를 서학에 대한 암묵적 용인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까.
부 정재원으로서는 은거를 꿈꾸는 아들을 곁에 붙들어 둠으로써 대과 준비에 계속 매진케 하는
동시에, 여전히 천주교에 깊숙이 관여된 아들을 감시하려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게리19-03-27 13:54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이기경 또한 서교(西敎) 이야기를 즐겨 들었고,
손수 책 한 권을 베껴 썼다”고 쓴 바 있다;;;.
게리19-03-27 13:57
을사추조 적발사건과 김동철 정감록 역모 사건을 나란히 둔 것으로 보아, 정감록 신앙이
서학과의 연장선상에서 위천주(僞天主), 즉 재림 예수의 코드로 인식된 정황을 엿볼 수 있다;;;.
늘배움19-03-28 08:52
1786년 12월 22일, 정조가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을 다시 서용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정국에 미묘한 변화가 읽혔다. 임금은 탕평의 구상을 내비치며 채제공을 불러들였다.
늘배움19-03-28 08:55
다산의 급제가 자꾸 늦어지자 정조는 장인인 홍화보와 나란히 그를 무반으로 키울 궁리까지 했던 모양이다.
늘배움19-03-28 08:59
젊은 날의 다산은 혈기가 넘쳤고, 단도직입적이었다. 돌려 말하지 않고 구차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또래 그룹의
리더였고, 행동대장이었다. 직선적이고 구차하지 않은 다산의 성격과 행동은 훗날 다산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하고, 위기에서 건져내기도 했다.
겨울19-03-28 10:57
4월 25일에 아버지 정재원이 사도시(司導寺) 주부(主簿)로 임명되더니, 바로 한성부
서윤(庶尹)으로 옮겼다. 채제공과 장인을 이어 남인들의 정계 진출에 속도가 붙고 있었다.
겨울19-03-28 10:59
“천주학에서는 천주 외에 다른 신에게는 제사를 지내지 않네.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을 뿐 아니라, 이 같은 글을 짓는 것조차 큰 죄가 된다네.”
이승훈은 끝내 한 글자도 안 쓴 채 과거장을 나왔다.
겨울19-03-28 11:03
홍낙안의 직격탄으로 다산의 1785년 봄 을사추조 적발 사건과 1787년 여름의
김동철 모반 사건, 그리고 겨울의 정미반회사가 공론의 수면 위로 다시 한번 떠올랐다.
소소한일상19-03-28 14:58
그 아들에게 틈을 타서 배우는 책을 가져오게 했더니, 바로 사서(邪書) 즉 천주교 책이었다. 그 책이 위로 임금의 귀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정약용이 또한 오래도록 벼슬길에 들지 못하였다.”
소소한일상19-03-28 14:59
정조는 다산이 천주학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
소소한일상19-03-28 15:01
둘은 만나기만 하면 이 책에 대해 토론했다. 이기경은 서학서를 베껴 나름대로 정리한 별도의 노트를 가졌을 정도였다. 을사년 추조적발 이후 금령(禁令)이 내리면서 이 일을 멈췄다.
소소한일상19-03-28 15:05
“천주학에서는 천주 외에 다른 신에게는 제사를 지내지 않네.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을 뿐 아니라, 이 같은 글을 짓는 것조차 큰 죄가 된다네.”
소소한일상19-03-28 15:05
이승훈의 태도에 경악한 이기경은 그날 밤 이승훈과 함께 자면서 그러지 말라고 나무랐다. 이승훈은 생각을 바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다산이라도 타일러 보려고 이후 이기경은 두 차례나 따로 더 다산의 집을 찾아갔다. 다산은 그를 따돌리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소소한일상19-03-28 15:09
젊은 날의 다산은 혈기가 넘쳤고, 단도직입적이었다. 돌려 말하지 않고 구차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또래 그룹의 리더였고, 행동대장이었다. 직선적이고 구차하지 않은 다산의 성격과 행동은 훗날 다산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하고, 위기에서 건져내기도 했다.
소소한일상19-03-28 15:11
다산이 다시 큰 물의를 일으킨 직후, 정작 문제를 제기한 이기경은 제풀에 위축되어 과거를 포기했고, 다산은 홍낙안이 자신을 저격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당히 그 자리에 나아가 답안을 제출했다.
소소한일상19-03-28 15:11
다산은 임금의 이 같은 태도를 서학에 대한 암묵적 용인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까.
산백초19-03-28 18:12
장인 홍화보가 이즈음 사위 다산에게 매산전(買山錢)을 내렸다. 생활의 근거로 삼을만한 땅을 사서 경제적 자립을 하라는 뜻이었다.
산백초19-03-28 18:13
1787년 10월쯤, 이승훈과 다산 등이 천주학을 다시 숭상한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산백초19-03-28 18:14
을사추조 적발사건과 김동철 정감록 역모 사건을 나란히 둔 것으로 보아, 정감록 신앙이
서학과의 연장선상에서 위천주(僞天主), 즉 재림 예수의 코드로 인식된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사오리19-04-04 01:25
우리가 사는 세상에 약하다고 세상속에서 그저 모든사람들이 그사람들을
당연히 위해주고 이해해줘야하는 세상이 아니다. 더이상 약함에 대한 오
해로 거짓으로 세상속에 이해받으려 하지 말아야함을 안락하고 강한자 뒤
에 숨어서 사는 삶에서 벗어나라. 세상은 착한 가면을 쓴 약한 인간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이들에게 벗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