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어느 날, 늦은 아침 우리 가족은 조용히 대사관 정문을 나섰다. 한여름이었지만 런던 날씨는 선선했다. 시원한 바람이 우리의 긴장한 마음을 식혀주었다.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 조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들에게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우리가 선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계속 걸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 길임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대’를 중시하는 북한 사회에서 출발부터 남달랐던 혜선 씨는 평양외국어학원(한국의 중고등학교)을 나와 평양외국어대 영어과 재학 중 외무성에서 일하는 남편 태영호를 소개받았다. 남편은 평양외국어학원 선배이기도 했다. 첫 선을 보기 전 남편은 “처자의 가정환경이 너무 요란하다”며 내키지 않아 했으나 두 사람을 모두 가르쳤던 은사가 “백년가약을 맺어도 후회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자 마음을 바꿔 선을 보러 나갔다고 한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외교관 가족으로 덴마크, 스웨덴, 영국과 평양을 오가며 살았다.
“우리의 선택은 배신이 아니라 자유”
“북한에서 특권을 누리며 행운아로 살아온 내가 어떻게 감히 북한을 배신할 수 있냐고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있다. 북한에는 김 씨 일가를 제외한 ‘특권’의 향유자는 없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다른 형태의 노예가 되어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을 건너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오 씨가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를 쓴 이유다. 오 씨는 해외 생활을 하면서 북한 사회의 불의와 김 씨 일가의 죄상에 대해 알게 됐지만 북한 정권을 굳게 믿고 있을 형제들에게 차마 그 실상을 알려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때가 됐다. 2019년부터 조금씩 회고록을 써왔지만 2020년 남편의 국회의원 출마로 잠시 접었다가 지난해 말 탈고했다. 한국에 온 후 일부 사람들이 남편을 향해 ‘배신자’니 ‘변절자’니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오 씨는 이렇게 말한다. “북한 김 씨 일가의 편에 선다면 ‘배신’이고, 북한 주민들의 편에 선다면 ‘자유’일 것이다.”
‘오백룡 가문’도 두려워한 노예사회
-평양에서 어머니가 TV 속 김여정을 보고 자연스럽게 ‘공주님’이라고 하는 것에 놀란 이유는 뭔가.
“어머니도 배운 분인데 자연스럽게 공주님이라고 하더라. 세습을 인정한 것이다. 북한에서 김 씨 일가는 창시자고, 북한의 태양이고, 북한의 신이기 때문에 영원하다고 말한다. 세습은 사회주의 공산주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이처럼 버젓이 강조한다.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어서 나만 놀랐을 뿐이다. 북한 사회는 김 씨 일가에 대한 충실성을 체질화한다. 모든 교육과 모든 활동과 개별적인 생활조차도 충실성을 근거해 진행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세뇌가 된다. 한국에 와서 보니 참 어리석구나, 온전한 정신으로 어떻게 저런 사회에서 살 수 있었을까 싶지만 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서열 2위’ 아들과 결혼한 친구의 비극
-북한 체제에 순응했다면 지금도 특권층의 삶을 누리고 있지 않을까.
“나도 어린 시절에는 행복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영원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나는 권력의 무서움을 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친구들. 그때는 그들의 비극적 운명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애써 외면했다. 한편으로 내 부모님은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북한에서 서열 2위라고 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며느리로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던 친구가 이혼 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도 보았다. 어떤 이는 그 친구가 통제구역에 끌려갔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간첩으로 총살됐다고도 했다. 언젠가부터 형제들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싫어졌다. 북한에서는 ‘태양의 곁에 너무 가까이 가면 타 죽고 너무 멀어지면 얼어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
김일성 일가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이라고 여겼다.
김일성의 충신이었던 아버지의 그늘 아래 남들보다 안락하다 여겼던 삶, 신적 존재인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것이 의리이자 도덕인 삶, 그것이 평생의 운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유년 시절, 하루아침에 온 가족과 함께 사라지는 친구들을 보며, 이제껏 누리던 안락함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곳의 삶은 힘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았다.
자유를 향한 갈망, 고민 그리고 선택
조국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고 믿고 싶었지만 조국이 아니라 독재자를 위한 노예의 삶이었다. 모두가 노예인 그 곳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기적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 기회를 놓친다면 아이들은 두고두고 부모를 원망할 것이다. 북한에 돌아가 다시 노예의 삶을 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스스로 노예 계약을 파기하는 그 선택의 무게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저자
북한 함경북도 라진시 출생이다. 2016년 대한민국으로 망명, 2021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북한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9-1991년 북한 무역성 국제전람사 양성생, 1991-1995년 북한 무역성 대외경제연구소 연구원, 1995-1996년 북한 무역성 조선광명무역회사 대외 사업처 지도원, 1996-1998년 덴마크 주재 북한 대사관 직원, 1998-1999년 스웨덴 주재 북한 대사관 직원, 1999-2000년 스웨덴 주재 북한 대사관 보조서기관, 2000-2004년 북한 무역성 조선광명무역회사 대외 사업처 담당부원, 2004-2008년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직원, 2008-2013년 북한 무역성 6국 담당부원, 2013-2016년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직원으로 근무했었다. 2018-2019년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 자문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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