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촉에 대한 소고]
5. 다시 촉(蜀)으로
촉은 서천(西川)이고 익주(益州)이고 월(越)이고 월지(月支)이다.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촉도(蜀道)를 따라 익주(益州)를 공략하여 한중왕이 된다. 지금의 섬서성 한중(漢中)에서 시작해 사천성 광원(廣元), 검각(劍閣), 면양(綿陽), 덕양(德陽), 성도(成都)까지 이어지는 650km의 험난한 산길을 따라 촉땅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삼국지에서는 익주로, 서천(西川)으로 되어 있다.
촉(蜀)이란 지리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익주와 서천(西川)이란 것도 필연적으로 동일한 범주에서 살펴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촉은 삼국시절 당시로 익주이고 서천이었는데, 사천이란 지명은 서천(西川)을 음사한 것일 뿐이란 것도 드러난다. 또한 천촉(川蜀)으로도 나타나는 기록도 있어 동일한 지리에 대한 이칭인지 다른 곳의 지리적 상황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촉(蜀)이라는 지리명칭으로서의 여러 가지 명칭이 얽혀있는 실타래는 이렇게 잡힌다는 것이다. 어차피 사천성이 주제의 한 부분이라면 이곳 지명에 대한 상식도 아울러 짚고 넘어가 본다.
- 광원(廣元)
검각, 검문관에서 도보로 10여분 거리에 광원(廣元)이 있다. 광원이 유명한 이유는 무측천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중국사에서 전무후무한 최초의 여황제 무측천이 태어난 곳이 촉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있다.
- 천불애(千佛涯)
광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이 가릉강(嘉陵江)인데, 이 강변을 따라 늘어선 절벽에 천불애(千佛涯)가 있다. 천여개의 불상을 포함한 7,000여 개 석상이 강변의 절벽을 따라 조각돼 있다. 사천성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석불로 처음에는 1만2,000여 개가 있었지만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많이 파손되었는데 뒤에 다시 사천성~섬서성 간 국도(108호)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훼손됐다고 한다.
- 덕양(德陽)
덕양은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러 가는 길에 동행하다 죽은 방통사묘(龐統祠墓)가 있는 곳이다. 방통이 죽은 것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와는 다른데, 36 혹은 38세에 병사한 것으로 보인다.
- 성도(成都)
방통사묘와 더불어 성도의 무후사(武候祠)는 삼국지와 관련된 유적으로 소열제 유현덕의 묘와 제갈량의 사당을 통칭하여 무후사라 하는데, 군주와 신하를 한 곳에 모셨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익주(益州)라는 지리명은 한반도에서는 익산으로 통하지만, 대륙에서는 지금의 사천성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사서의 기록을 인용하여 보면, 신교본후한서(新校本後漢書) / 열전列傳 / 卷七十五 류언원술여포열전(劉焉袁術呂布列傳) 제 65(第六十五) / 유언(劉焉) 편에,
“한漢나라때 촉蜀을 이르길 수叟라고 한다. 공안국孔安國이 상서尚書를 주석하여 이르길, ‘촉蜀은 수叟이다’라고 하였다.” 漢世謂蜀為叟。孔安國注尚書云:「蜀,叟也。」
라는 기록이 있다. 촉(蜀)은 그냥 발음대로 수(叟)라고 했던 것이고, 후대에 천촉(川蜀)이란 명칭으로 사천성 지역을 광범위하게 통칭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촉(蜀)은 한자의 뜻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 단지 그 음가가 ‘수’라는 것이며 중경(重京)과 성도(成道)라는 강남지역의 양쪽을 아울러 파촉으로 널리 통용되어 오고 있기도 하다.
결국 파(巴)라는 음가와 서(혹은 수)라는 음가는 한중이라는 지명과 더불어 촉(蜀)이라는 지명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결국 파-밝이라는 파미르 지역과의 관련성에서, 또 득롱망촉(得隴望蜀)이란 고사성어와 관련지어 농(隴)이란 지명과 일정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회남자(淮南子)·지형훈(地形訓)에서 언급된 한수(漢水)가 나오는 파총산(嶓塚山)이란 지명과 더불어 파미르고원과 관련지어 깊히 고찰하여 볼 사안이기도 하다.
현재 지리명과 아울러 그 연원적 지리에 대한 고찰을 집요하게 하면 할수록 그 집약되는 지점이 나오게 마련이며, 이러한 뚫어져라 파고드는 과정을 통하여 지리와 인사의 얽힌 문제에서 금싸라기 같은 값진 단편들이 얻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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