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성인(聖人)
愚人以天地文理聖,我以時物文理哲。
(人以愚虞聖 我以不愚虞聖 人以奇期聖 我以不奇期聖)
우인은 천문과 지리를 통달함을 성이라 하나, 나는 물리를 시행함을 명철이라 하느니라. 사람들은 어리석음으로 성을 걱정하나 나는 어리석지 않음으로 성을 걱정하느니라. 사람들은 기특함을 성으로 기약하나 나는 기특하지 않음으로 성을 기약하니라.
성인의 명철함은 범인이 말하는 성인과 다른데 광성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범인(凡人)이 천문지리를 알고 있으면, 천지 음양이 있음으로부터 내가 있고 내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지 못하여 성인을 외형(外像)으로 말한다. 음양은 귀신을 헤아리지 못함과 같은 법도(鬼神不測之法)이며, 천지를 통하는 크고 작은 저승의 이치(天地通大小幽冥之理)이다. 어리석은 자가 지은 바는 내가 천지음양으로 더불어 시물(時物)에 모두 함께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不知我與天地陰陽時物皆同) 천지의 이치는 성인의 기(機)이다. 지극한 도(至道)이고 만물의 근본이며 음양의 종(宗)인 까닭에 변화가 무궁하여 마침내 도가 지극한 고요함(至靜)에 이르게 되어 내가 있게 되는 것이다. 도가 스스로 그러함(自然)으로 만물이 물로 존재하고(有物) 내가 밝음(哲)으로 삼는 것이다. 음양이 서로 이기지 않는데 어찌 내가 함께 하면서 이기겠는가. 이기는 것은 나의 신이다. 신(神)은 지극한 도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나의 영(靈)이 음양과 같이 성스러운 것이다. 천지라 함은 두 가지 기가 맺어진 것이므로 만물도 다 같다. 신과 기가 뛰어날 때 대도에서 성스러운 것이다. 내가 천지를 포함한 대도를 알고 있으면 명철함을 다하는 것이다. 지진(旨眞)의 이치로 내가 자연 성스럽게 변화하니(聖化) 삼청(三淸)인 것이다.”
화양은 “도의 이치는 관심(觀心)으로 득성(得性)하며 관성(觀性)으로 득천(得天)한다”고 하였으며, “현자(賢者)는 지나치고 살피지 못하여 못 미치게 됨이니, 성리(性理)를 궁구한다는 것에 조금도 총명함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인식과 지식으로서가 아닌, 불식부지(不識不知)의 이치를 체득해야 함을 말하였다.
시물(時物)이란 격물치지의 이치이니 도가 무심(無心)에 있어서 생각이 있다는 것(有思)은 하책인 것이다. 범인(凡人)은 어리석을까 걱정하여 지식으로 알려고 하지만 도(道)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에 어리석지 않을까 걱정한다고 하였다. 무심(無心)하다는 것은 득심(得心)을 버리는 것이니 어리석은 것이지만 이러한 어리석음이라야 도에 가까운 것을 말함이다. 성인이 스스로 그 성(性)을 기약함은 생이지지(生而知之)이며, 그 성(性)을 기약하지 아니함은 학이지지(學而知之)이다. 성(性)은 관심(觀心)하여 하늘의 지극함으로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이 하나로 극에 이르면 누구나 중용을 이룰 수 있다.
함허는 “어리석은 자는 통천문(通天文)하고 찰지리(察地理)하는 것을 성(聖)인줄 알지만, 이것이 자기의 신심에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내가 천문 중에 그 시행의 묘를 고려하고 지리 중에 그 만물이 생하는 기틀(機)을 살펴 천지를 훔치고 조화를 빼앗아야 바야흐로 명철(明哲)에 부끄럽지 않게 되니 소위 관천지도(觀天之道) 집천지행(執天之行)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함허는 인이우우성(人以愚虞聖) 아이불우우성(我以不愚虞聖)을 수련을 알고서 하면 성인이라는 것으로, 인이기기성(人以奇期聖) 아이불기기성(我以不奇期聖)을 그 신의 신묘함을 알고(知其神之神) 신 아닌 신의 신묘한 이유를 모름(不知不神之所以神)이라는 것으로 말하였다. 일월이 유정하고(日月有定) 대소가 유수하고(大小有數) 삼재가 상도하다(三才相盜)는 것이 모두 자연의 성공(聖功)인데 무슨 기이한 것이 있으랴. 함허는 앞의 구절을 다시 상기하여 이 구절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생사존망과 길흉화복이 모두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니(存亡禍福皆由人興) 하늘의 재앙과 땅에서 일어나는 요상한 변고가 더해질 수 없음이니(天災地妖不能加也), 이는 곧 천재지변이 선정을 이기지 못함이고(災妖不勝善政),괴상한 꿈이 선행을 이기 못함이다.(怪夢不勝善行也) 당요가 구년홍수를 만나고(堯遭洪水) 탕이 칠년대한을 만나도(湯遭大旱) 모두 그 천재지변이 있는 해에 성스로운 공적을 쌓아(皆積有歲年) 억조 백성이 화평을 이루었다.(兆庶和平) 군신에 도가 있었고(君臣有道) 다스리는 이치가 고르고 온화했으며(政理均和) 군주가 믿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니(主信臣忠) 백성의 어느 누구도 홍수와 가뭄을 재앙으로 삼을 수 없었다. 홍수와 가뭄이 시물(時物)이었으나 시물의 이치에 밝음이 모두 전화위복일 수 있음은 죽음을 생으로 되돌림이다.(易死為生) 이러한 이유로 성인과 나는 시물문리로써 하나이다.(聖我以時物文理)
시물(時物)이란 ‘주역 계사전(繫辭傳 下9)에 "6효가 서로 섞이는 것은(六爻相雜) 오직 그 때나 사물에 따른다(唯其時物也)"라는 구절에 나오는데,, 주역의 각 괘(卦)는 매순간 그 때마다 직면하는 전체적인 상황을 나타내고, 그 괘의 각 효(爻)는 행위자들의 그 때 거기에서의 위치를 동시에 하나로서 나타내준다. 주역에서 말하는 시물(時物)이란 바로 그 때 동시에 거기에서 하나의 전체로서 드러나는 물(物; 사태) 자체, 존재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물(時物)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실천이 바로 '시중(時中)'인 것이다.(김재범, 주역 사회학, p. 86~87.) 시물(時物)이란 시중(時中)에 나타나는 사물 사건(物)을 말함이다.
아무리 천문지리에 재앙이 닥친다 할지라도(此時天地文理示其災祥) 정령을 잘 닦아 두었다면(但能修政令) 은혜가 사졸을 위무하여(恩撫士卒) 전화위복이 되니(轉禍為福) 적이 감당할 수 없게 된다.(敵何敢當) 이러한 시물의 문리(時物文理)가 있는 까닭에 하편에 강병전승지술(強兵戰勝之術)이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