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매한 봉건통치자들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여 전국을 통치하였을까.
그들이 사용한 방법은 아주 간단하였다. <폭력과 살인> 딱 2가지이다.
역대 봉건통치자들은 설득을 통하는 방법이 결핍되었기에 강제적인 힘을 가지고 제압하였다.
중국에서 최초로 폭력을 사용하여 사상을 제압한 자는 기원전 800년 주여왕(周厲王)이다.
그는 백성을 감시하기 위하여 위무(偉巫)라는 감시자를 두었다.
그들의 임무는 주여왕 자신의 말을 거론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백성들이 어기면 그 자리에서 목을 치었다.
그 당시의 시대상황은 서로 말을 나눌수 없었고 눈짓으로 의사소통을 할 정도였다.
삼년 후 분노가 폭발한 백성들은 그 국왕을 쫓아냈고, 그에게 흉악한 왕이라는 뜻에서
“여왕(厲王)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사상통제의 가장 저급한 표현방식을 “문자옥(文字獄)이라고 표현한다.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문자옥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함양(咸陽)에서 한꺼번에 460명의 사람들은 처단한 사건이다.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대단한 일도 아니고 단순하였다.
통치자의 이익에 위배하다고 판단이 된다면 ”대역무도“의 죄로 엮어 목을 쳐버린 것이다.
청나라 때에는 이러한 일이 있었다.
옹정(雍正)황제 시기에 강서(江西)의 고시관이었던 사사정(査嗣廷)이 출제한 시험 제목이
옹정황제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것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시험 제목이 유민소지(維民所止)였는데 유(維)자가 옹정의 옹(雍)에서 머리를 제거한 것이니
옹정의 머리가 나쁘다고 간접적으로 나타내었다는 이유였다.
이후 이들은 그 죄를 더 하기 위하여 사사정이 쓴 일기까지 찾아내어서 꼬투리를 잡아서
이미 옥사한 사사정의 시체를 도륙하였고 그의 가족은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어느 시대든지 폭압과 폭정을 가하는 군주가 활용하는 법칙은 단순하다.
자신의 뜻에 반하는 사람을 밀고하게 하는 밀고자를 만든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을 죽인다.
이것은 심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지식인들은 감히 진실한 사상을
표출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권세에 빌붙고 아부하는 무리들을 만들어 낸다.
모든 사람들은 앵무새가 되어서 말을 배운 것처럼 똑 같은 말을 하게 만든다.
청나라 대장 연갱요(年羹堯)는 옹정황제의 심복일 뿐 만 아니라, 옹정을 황제로 만드는 데
탁월한 공을 세웟다. <공이 커지면 주인을 놀라게 한다>라는 말처럼 과거의
폭압적 군주독재자들에게는 오직 이용하고 버리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다.
연갱요는 바로 옥에서 옥사하였고 그를 비호하는 모든 세력은 철저하게 더불어 처단되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숨기고 억압해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모든 죄악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과거의 역사에서 무능하고 어리석은 군주는 <살인과 폭력>이 오직 그들을 지키는 무기이다.
자신의 처지에 반하는 말을 하면 온갖 욕을하고 그 주위에 온갖 앵무새들이 포진되어 있고
권세에 빌붙은 자들이 똑같은 말을 지껄이는 이러한 약속된 형태가 보이는 곳.
무능한 놈이 천자 꿈을 꾸는 곳.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앵무새 놈들의 집단
권세에 빌붙은 아부하는 놈들의 집단
그 곳에 상제님 대도의 미래가 있겠는가.
어차피 망하는 그들의 역사이다.
시간은 물처럼 흘러 스스로 망하는 역사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천자 꿈을 꾸기 위하여 책을 꾸민 놈에게 빌붙은 놈들은
오늘도 전쟁과 병이 일어나서 모든 사람들이 죽고 자신들이
꿈꿔온 성 하나씩 배분받아 군주가 되는 꿈을 꾼다.
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세대에 상제님의 대도를 저런 식으로 농단, 농락하는
추악안 욕심으로 무장된 자들은 이번 사오미가 지나도 그깟 돈 몇 푼에 가솔을
거느리는 시정잡배의 행위를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또 어느 힘없는 개인에게 하이에나가 되어서 죽이는 입을 맞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