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ML(네덜란드 EUV 생산업체)은 어떻게 반도체 부품 독점기업이 됐나
사람들에게 디지털 경제의 중심을 짚으라 물으면, 많은 이들이 미국 실리콘밸리를 가리킬 것이다. 애플과 구글, 페이스북을 필두로 매력적인 스타트업들이 즐비한 곳이다.
어떤 이들은 시애틀을 지목할 수도 있다.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본사가 있는 곳이다.
또 다른 이들은 중국 기술허브인 선전시를 고를 수도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신호에서 "네덜란드 다섯 번째로 큰 아인트호벤시 외곽의 별다른 특징 없는 마을 벨트호벤을 꼽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라며 "좀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무릎을 치게 된다.
이곳에 본사를 둔 ASML은 현대 반도체칩 제조를 좌우하는 최신 장비를 만드는 유일한 기업"이라고 전했다. 이 매체는 "반도체칩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든다면, ASML은 수조달러 글로벌 기술 산업의 핵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기업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ASML은 '포토 리소그래피'(Photo Lithography)를 만드는 기업이다. 리소그래피는 빛으로 실리콘 웨이퍼 위에 집적회로를 새기는 장비다. ASML이 해당 장비를 만드는 유일한 기업은 아니다. 일본의 캐논, 니콘 등 쟁쟁한 기업들과 경쟁한다. 하지만 2005년 이후 ASML의 시장점유율은 거의 2배로 늘어 현재 62%에 달한다. 그리고 유일하게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를 생산한다. 13.5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파장을 자랑한다. 파장이 짧으면 더 작은 부품을 '에칭'할 수 있다. 반도체회사들이 '무어의 법칙'(칩의 밀도가 2년마다 배로 늘어난다는 법칙)을 구현하는 데 긴요한 작업이다. 미국의 인텔, 한국의 삼성, 대만의 TSMC 등 세계 3대 반도체 회사들이 ASML에 점차 의존하게 된 까닭이다.
당연히 ASML의 실적은 눈부시다. 지난해 경기에 민감한 반도체업계는 너나없이 부진했다. 하지만 ASML 매출은 오히려 8% 늘어 118억유로(132억달러)를 기록했다. 지난해 ASML이 판매한 229개 리소그래피 장비 가운데 EUV 장비는 단 26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매출액에서는 1/3을 차지한다. 장비 한 대 가격이 수천억원에 달할 정도로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ASML은 2025년 매출 3/4을 EUV가 책임질 것으로 예상한다. 반도체기업들이 기존 '단자외선'(DUV)을 속속 EUV로 업그레이드할 것이기 때문.
캐논은 개발 자체를 포기했고 니콘도 손을 놓았다. 따라서 투자자들은 당분간 ASML의 독주가 지속될 것으로 본다. 2010년 이후 ASML 시가총액은 10배 늘어 1140억유로에 달한다. 지난해에만 거의 2배 가까이 상승했다. ASML은 에어버스나 지멘스, 폭스바겐보다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 시장을 강타하면서 ASML 주가 역시 주춤하지만, 장기 전망은 탄탄하다는 분석이다. ASML의 미래 주가수익률(forward PER)은 32배에 달한다. 3대 반도체기업의 두배 또는 그 이상이다.
늘 호시절만 누렸던 건 아니다. ASML은 1984년 네덜란드 전기가전기업 '필립스'와 반도체장비 제조업체 'ASM인터내셔널'의 합작벤처로 탄생했다. 필립스의 아인트호벤 공장 내 목재로 만든 헛간에 둥지를 틀었다. 초기엔 어려움이 말도 못했다. 첫 번째 제품은 나오자마자 구식이 됐다. 고객을 찾는 데 계속 실패했다. 필립스의 지원, 네덜란드 정부의 보조금 등으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1995년 뉴욕과 암스테르담 증시에 상장했다. 얼마 안돼 ASML은 "EUV 리소그래피가 반도체칩 제조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라며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주요 반도체기업들은 ASML의 새로운 장비를 2007년쯤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또 다시 실망했다. ASML 주주들도 마찬가지였다. ASML은 EUV 광선이 극도로 다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좌절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06년 ASML의 첫 번째 시제품이 벨기에 연구소 IMEC에 보내졌다. 하지만 글로벌 고객기업들이 EUV 장비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2018년이 돼서였다.
초기 버전의 장비는 극자외선을 직접 만들어내기 위해 레이저를 활용했다. 하지만 파장이 줄어들면서 상황이 까다로워졌다. 한 대의 최신식 EUV 장비 안에선 1초마다 5만개의 용융주석 방울이 체임버를 거쳐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쌍의 레이저가 모든 주석 방울에 쏘아지며 플라스마를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원하는 파장의 빛을 얻을 수 있다. 이 빛을 유도하는 거울은 실리콘과 몰리브덴 레이어를 붙여 만드는데, 매우 정밀하고 평평한 면을 갖고 있어 독일 영토 크기로 확대한다 해도, 1밀리미터 이상의 돌출이 없을 정도다. EUV 광선은 공기를 포함해 거의 모든 것에 흡수되기 때문에 제조공정은 진공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
EUV 장비는 무게 180톤에 크기는 2층버스 규모다. 장비 자체가 전자산업의 복잡한 공급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ASML는 약 5000곳의 협력업체를 두고 있다. 독일 광학기업인 칼자이스가 ASML이 쓰는 렌즈를 만든다. 네덜란드 기업 VDL은 웨피퍼를 장비에 집어넣는 로봇팔을 만든다. 광원(light source)은, 미국기업으로 2013년 ASML에 인수된 '사이머'에서 담당한다. 결국 ASML도 반도체칩 회사에 자사제품을 공급하는 수백 곳의 협력업체 중 하나다. 하지만 ASML 비중이 워낙 절대적이라 인텔과 삼성, TSMC 모두가 ASML에 지분투자를 하는 등 연구개발 비용을 갹출한다.
ASML의 우월적 지위는 고객사나 투자자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정치권 역시 이를 주시한다. EUV 리소그래피는 '바세나르 체제 '리스트에 포함돼 있다. 이 체제는 재래식무기와 이중용도 품목 및 기술의 불법축적 방지를 위해 만들어졌다. 즉 EUV 리소그래피가 군수용으로도 민수용으로도 사용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의미다.
중국은 자체적으로 반도체칩 선진제조 기업을 양성하려 한다. 반면 미국은 이를 저지하려 한다. 2018년 ASML은 중국 고객기업으로부터 EUV 장비 1대의 주문을 받았다. 중국 최대 반도체기업인 'SMIC'로 알려졌다. SMIC의 제품은 현재 최신기술로부터 약 2세대 정도 뒤처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미국의 거센 압력에 아직까지 ASML에 수출허가장을 내주지 않고 있다.
ASML으로선 최대 규모의 중국 시장을 포기하는 대가가 클 수밖에 없다. 중국을 배제하면, 결국 ASML 스스로 시장지배력을 위태롭게 하는 처사가 된다. ASML 장비를 확보하지 못한 중국 기업들이 전력을 다해 자체 생산하는 방향으로 선회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ASML은 중국인을 포함한 자사 직원 6명이 2015년 미국 지사에서 영업비밀을 조금씩 빼돌리다 적발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국 정부와 연계돼 있다는 일각의 추측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컨설팅기업 '뉴스트리트리서치'의 기술애널리스트 피에르 페라구는 "ASML이 중국을 원하는 것보다 중국이 ASML를 원하는 정도가 훨씬 크다"며 "중국이 선진 반도체칩 제조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ASML 기술이 가장 절실하고 또 가장 베끼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컨설팅사인 '퓨처호라이즌스'의 맬컴 펜은 "중국 기업이 ASML을 따라잡으려면 10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며 "결국 따라잡는다 해도 최신 기술은 또 다시 그보다 훨씬 발전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는 이미 더 진보한 광학기기를 갖춘 차세대 EUV 장비 개발에 착수했다. 시간당 실리콘 웨이퍼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 있다. 2023년 출시를 목표로 잡았다.
이코노미스트지는 "ASML의 유일한 바람은 '과거처럼 출시가 늦어지는 일만은 피하자'는 것"이라고 전했다.
내일신문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