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론 [ 交友論 ]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신부가 중국에 들어와 처음으로 저술한 서양 윤리서.
1582년에 마카오에 도착한 리치는 1583년 9월에 광동성(廣東省) 조경(肇慶)에 가서 활동하다가 1589년 여름에 조경에서 추방되자 소주(韶州)로 가서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구태소(瞿太素)에게 천주교의 교리와 서양의 수학·기하학 등을 가르쳐 입교시키고, 자신은 그에게서 유교의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웠다. 또한 구태소의 제안에 따라 1594년부터는 승복을 벗고 유학자의 복장을 하였고, 이름을 ‘이마두’라고 하고 유학자들의 관습에 따라 호를 ‘서태(西太)’라 지은 뒤 서방에서 온 학자[西士]로 행세하였다. 이어 1595년에는 남경(南京)으로 갔으나 곧 쫓겨나 남창(南昌)으로 가서 약 3년 동안 지내게 되었는데, 이 기간에 수학과 기예 등의 학문을 바탕으로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교우론』을 저술하였다.
리치는 1595년 봄에 남포(南浦)에서 건안왕(建安王)을 만났는데, 이때 서양의 우정에 대해 질문을 받자 이를 계기로 평소에 들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 등의 우정론을 바탕으로 교우 관계에 대해 서술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이 바로 『교우론』이다. 1595년에 풍응경(馮應京)과 구여기(瞿汝夔)의 서문을 붙여 남창에서 1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 이후 이 책은 벗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의 지식인들에게 큰 호응과 반향을 일으켜 1603년 북경에서 재판되는 등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그리고 1629년 이지조(李之藻)가 편찬한 『천학초함(天學初函)』과 청나라 때 편찬된 『사고전서(四庫全書)』에도 수록되었다.
이 책의 본문은 장절 구분 없이 모두 100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조목을 소개하면, 제1조목에 “나의 벗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의 반쪽이니, 비로 제2의 나이다.”라고 하였고, 제2조목에 “벗과 나는 두 개의 몸이지만 두 몸 안의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하였으며, 제66조목에 “좋은 벗과 사귀는 맛은 잃은 뒤에 더욱 깨닫게 된다.”라고 하였고, 제79조목에는 “세상에 벗이 없는 것은 하늘에 해가 없는 것과 같고, 몸에 눈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 책은 17세기 이래 조선에 전해져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이수광(李晬光)이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이 책을 소개하였고, 유몽인(柳夢寅)도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이 책을 언급하였다. 또한 이익(李瀷)도 1754년에 정항령(鄭恒齡)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우론』을 두고 모두가 뼈에 사무치는 말이라 하였고, 1784년(정조 8)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들여온 『천학초함』에도 이 책이 들어 있었다. 아울러 박지원(朴趾源)도 『연암집(燕巖集 )』에서 벗을 ‘제2의 나’라고 언급하였으며, 이규경(李圭景)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도 『교우론』의 구절을 가져와 문장을 완성하였다.
교우론 [交友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쪽 끝으로부터 항해하여 중국에 들어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명나라 천자의 아름다운 덕과 옛 선왕이 남기신 가르침을 흠모하여, 영표땅(오늘날의 광동성과 광서성)에 거처를 마련한지 수년이 지났습니다.
올해 호남성과 광동,광서성의 경계에 있는 산맥을 넘고 장강을 타고 금릉(남경)에 닿았습니다.
(올해는 1595년을 말한다. 마테오리치는 먼저 거주지인 ‘소주’를 떠나서 명나라 조정의 병부상서인 ‘석성’의 도움으로 어려운 항해 끝에 처음으로 남경에 도착한 날짜는 1595년 5월31일이었다.)
중국의 여러곳을 관광하며 점점 즐거워졌고, 이 여행이 거의 헛수고가 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멀리 유람을 하다가 미처 다 보지 못하고 예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장 – 오늘날의 강서성의 난창시, 마테오리치는 강소성의 남경에 정착하고 싶었지만, 당시는 명나라가 조선에서 일본과 전쟁을하는 임진왜란(1592~1598)기간이라 외국인의 수도권의 거주가 엄격히 통제되어, 남경의 거주가 좌절되고, 다시 광동성으로 쫒겨 가던중 우연히 그의 지인들의 도움으로 난창에서의 거주가 허용된다.
배를 남포에 대고 눈을 들어 서산(西山을 바라보니 풍광이 수려하여 수재를 끌어들일 만하였습니다. 이 땅이 걸출한 인물들이 모일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머뭇머뭇 맴돌며 떠나지 못하다가 드디어 배에서 내려서 여관에 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건안왕(왕에 봉해진 황제의 자식들 중의 하나)을 찾아뵙고, 옅지 않은 (은덕을) 입었습니다.큰절을 올리는 것을 허락하였고, 좋은 음식을 차려서 손님으로 맞아 주며 매우 환대하였습니다. 왕이 곧 자리를 옮겨 와 내 손을 잡으며 말하였습니다.
무릇 덕행을 갖추신 군자가 제 영지에 와 주셨을 때는 일찍이 벗이 되어 달라고 청하고 또 그를 공경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서양의 나라는 도의를 [숭상하는) 나라라고 하니, 벗의 도리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듣고 싶습니다."
제가 물러나서 예전에 젊었을 때 들은 바를 서술하여 벗의 도리에 관한 책 한 부를 완성했으니, 삼가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어 보았습니다.
<본문>
1. 나의 벗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의 반쪽이니, 바로 '두 번째의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벗을 자기처럼 여겨야 한다.
2. 벗과 나는 비록 두 개의 몸이지만, 두 몸 안의 그 마음은 하나일 따름이다.
3.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돕는 것이 벗으로 맺어지는 이유이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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