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기동 도장이 재정파탄으로 붕괴되자 증산도 판을 구축한 태사부님은 안중건과 함께 대전으로 낙향하고 안중건은 그 책임을 안병섭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안병섭이 구축한 증산도 전체판을 모두 해체하자고 태사부님께 조르는 가운데 안 병섭은 전라도 판을 개창한 전라도 연원의 총사수 김 영곤의 모친의 힘을 얻어 그동안 성약성서 외에 출판한 책이 없어 유명무실한 출판사를 다시 정비하고 서울 충무로에 세를 얻어 안광현과 함께 다시 대광서림에서 개벽 책 판권을 사들여 대대적인 광고(국내출판사상 최고액 광고인 김정빈 소설 <丹>의 일억 오천을 넘은 광고)에 들어가 매스미디어 광고를 통한 포교를 대대적으로 벌리게 됩니다.
윤혁중으로 하여금 자금 300만원을 주어 회기도장 폐쇄이후 공백상태가 된 서울도장을 대표할 대림도장을 전세로 얻게 하고 대대적인 광고에 들어갑니다. 이때 들어온 일꾼들이 후일 전국 도장의 중견간부로 성장합니다. 다시 판이 성숙되어감을 지켜 본 안중건은 증산도 해체를 선언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고 다시 증산도 단체 구축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고 대림도장이 협소해지자 이번에는 마포 고급스러운 성지빌딩에 120-150평 정도의 건물 한 층을 통 째로 빌려 옮기면서 성지도장은 잠시 서울의 대표도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85년 당시 국내 출판사상 소설 <단>이 단일 책자 광고비 1억 5천이 역대 최고액이라는 소문이 나돌 때 안병섭은 사실상 수중에 하숙비마저 없어 충무로 거리에서 삼시세끼를 때우고 연희동의 김 영곤 신도 지하 빌라 창고방에서 자면서 약 1억 8천 정도의 광고를 무식하게 해댑니다. 안원전이 포교 비망록으로 밝히는 이당시의 현황과 이를 계기로 들어온 사람들 명단을 기록합니다.(아래)
-80년대 중후반 안원전은 출판사와 집필 그리고 전국 대학가 서클조직 확장 및 강연으로 대학가 서클을 100여개로 확대하며 조직을 확장 해 갑니다. 오늘의 증산도가 존재하게 된 공덕에 전라도 전주 광주를 개척 포교한 김영곤의 공덕이 지대 합니다. 그때 김영곤의 어머니 김정애 당시 도감(당시 전국최고위직)은 연대앞 창천동 산꼭대기 한옥에 살았는데(안원전은 연대를 포교하려 신촌 4거리 산꼭대기 교회 앞 김도감 한옥 인근에 잠시 살고 있어 자주 들렀음) 84년 말 회기동 도장이 망하고 없어지자 그 집을 당시 2000만원(지금의 4-5억 호가)에 팔아 500으로 서교동 연립주택으로 옮기고 1500을 모두 대전과 출판사에 성금으로 밀어넣읍니다.
출판사에서 받은 돈으로 당시 김구연 아버지가 경영하던 대광서림에서 발행하고 있던 보라색 표지의 이것이 개벽이다 책을 300만원에 판권 인수하는데 쓰고 몇 일 있으니 윤혁중에게서 대림동에 신도를 다시 규합해 새로 출발할 싼 도장 건물이 나왔다고 지금 급하니 300만원만 빌려 달라고 연락이 와서 빌려주는데, 그때 300만원을 당시로서는 통크게 빌려줬는데, 그 후로도 돈 반환받은 사실 없다고 합니다.
출판성금으로 900만원 받은 중 남은 돈 300만원으로 을지로 명보극장 바로 뒷 건물 수향다방 2층에 미성사라는 6평짜리 조그만 사무실에 자리 보증금 70만원 월세 12만원에 대원출판사 시대를 다시 엽니다. 이때 남은돈 비품비 빼고 150만원으로 엄청난 배팅을 해대기 시작하는데.(최신형 현대 포니 액셀이 200만원할 때) 당시 전국적으로 전 일간지의 광고열풍으로 베스트셀러 단의 열풍이 어마어마 할때였읍니다.
대원도 사무실이 초라했으나 국내 5대 일간지를 비롯 부산일보 대구매일 등 지방지 포함 심지어 종교신문 교통일보 각종 여성 월간지 신동아 월간조선 등 각종 월간지 주간지 등 각종 전 매체에 1억5천 이상의 광고를 해대고 이 여파로 괴정동 스레이트 도장도 지금의 2층 본부로 업그레이드되고 단체도 다시 대학가에 활기를 찾기 시작합니다.
이때 들어온 사람들이 한경섭(홍대 산업공 서울), 이희동(연대 부산출신 85년 말 서클유입 서울 86년 입문), 정재성(동의대 부산 86입문), 전정민(원광대 전주 86입문), 여인흥(강원대 춘천 86입문), 최승호(동국대 회계과 85년 입문), 조우성(감리신학대 86.3월 마포성지 도장입문), 노영주(서울대 물리학 서클 증산도가입문 85년.5월 ), 최영규(86'서강대 졸 마포도장 소속), 김경주(전북대 85.11월 전주도장 입문), 양재봉(부산대 84년 1월 입문), 김한성(부산대 85년 11월 입문), 정윤석(서울대 83년 8월 입문 서울대 증산도가 심방 입문),정준열(강원대 86년 입문), 정현희(효성여대 대구도장 83년 2월 입문 정경화 동생), 이병득(63년생 경남대 83년 입문 마산도장), 신기정(경희대 춘천도장 기독교7년 경력), 김형주(66.조선대 광주도장 86년 입문), 안명욱(63. 86입문 대구대 체육 대구도장),김현종(조선대 서클통해 입문),윤병일(64. 86' 입문 경북대 물리),최병호(66.86' 입문 진주 경상대), 노종욱(66. 85.3월 입문 전남대 광주 ), 남인석(66. 85' 조선대),이승계(66. 87 정월 원단 입문 창원대학), 류형기(67. 86' 경상대 진주 수도관심으로 입문), 안병률(67. 86' 성대 서울마포), 노순창(65.86' 서강대 마포성지), 김경주(61. 85' 전북대 전주도장), 양재봉(63.84'입문 부산대 부산), 김한성(68. 85 부산대 부산),김형찬(76. 85' 서울대), 채철식(66. 86.3월 한양대 서울마포), 김병석(65. 84' 서울대 경영 서울마포), 정형욱(65. 85' 외대 대림-서울마포), 김형찬(67.85' 서울대 마포), 이현주(66. 85' 이대 서울 마포도장 언니 이윤포교), 전필승(64. 86.7월' 연대 경제 서클장역임), 김원형(65. 85' 원광대 전주도장),박정두(67. 86' 원광대 전주도장),이수호(67. 86.8'부산대 부산도장),문영순(65. 84.7' 이대 신방 서울 대림도장-서울마포), 원준희(64. 86' 성대 서클장 서울 마포도장), 전근열(62. 84' 회기-대림-마포 대포 회장) 장동원(64. 86.2' 한양대 정외), 문성희(66. 86.10' 서울대), 김영만(67.86.5' 고대 사학 서울 마포),이훈오(연대 대배달민족회 실무책임),김수효(고대), 채형우(연대 연세춘추 편집장),김영주(외대), 안정미(숙대 서클장), 여미경(숙대 김영주 포교), 심수연(숙대),박민제(외대 중국어), 최만석(단국대 노상균),정명희(대구),하혜경(마창),하미경(마창) 조정호(진주), 조욱희(진주),박정숙(세종대 대학원 진주), 이재훤, 안중겸(명지대), 이윤, 송창섭(마포 일반),최상일(강남 일반 출판사 사장), 김**(김춘수 시인 아드님 마포-은평), 신**(신용하 교수 부친), 윤외성, 윤의성, 이문록, 고경애(동대문 도장 개창), 문천식, 이화순,김형배(마산: 선화동 매입 공덕 김대중, 김사중 2 아들 입도), 김대중, 김사중, 이상보(여), 유윤식(서울),정수진(홍대), 현혜정(홍대 정수진과 만화 그림), 송성재(산업은행), 한만규, 박범해(종정 비서실장. 군 대위출신. 한만규는 박범해 수행비서. 2인의 잦은 신도 협박 폭행으로 87,88년도 여러차에 걸쳐 물의(성지도장 시절 지도자 방에서 홍대 경영과 교수 신도(후일 경영대 대학원장역임) 폭행 협박 현장을 안원전에게 들킴. 신도협박폭행의 최초의 선발주자인듯) 풍납동 도장(고경애 종로 동묘도장 개창전으로 당시는 동대문 도장명으로 먼저 개창) 개창한 김정자, 김청심(김정자 는 당시 50대 중반으로 대진회 탈퇴신도로 같은 대진회 탈퇴신도 김청자와 충무로 안원전 출판사로 88년도에 찾아와 2000만원 선 지급보증해주면 김정자 이름으로 도장 계약해 개창하겠다해서 도장 확대 욕심에 2000만원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함, 그때는 신도에게 차용증을 차마 받지못했던 점을 악용한 김정자는 후일 보증금 2000만원 빼 나가동대문 도장이 폐쇄되고 신앙도 그만두었음. 부도막기 위해 안원전이 이돈을 틀어막게 됩니다.
이 개창 도장의 첫 책임자이자 마지막 책임자는 지도자 딸과 결혼하고자 하던 이종성의 접근을 반대한 태사부님이 당시로서는 외진 이 곳 책임자로 발령해 차단하고자 노력했다)후일 고경애 여사가 동묘 도장을 개창하니 오늘의 동대문 도장이다.), 김재남(뉴욕) 김동훈(대원 출판사 영업부장), 이동운(강남도장 교정 및 종무실장 역임), 견석남(의정부, 인천 정보식과 태사부님 선화동 지속적인 사금고 역할 공덕), 노정호(강남도장 교정역임.견석남), 이재문(의정부),박완병(의정부), 양희용, 이정상(베링거잉겔하임 이사), 김종욱, 한윤식(부산), 오호균(충대 동경대), 서원일, 서호원, 이상일, 하한출, 양승진, 지승룡(대포), 심명순(명자 춘천), 이원형, 김태일(세무사), 정성찬,김양중, 박경민(한양여전 대원 출판사근무), 박태진(인천), 문종광(춘천), 윤상(초등출신으로 저돌적 신앙내공이 대졸보다 나은 맹장), 전영집(이천), 김범성, 김세환(대천), 박내수(춘천), 신철홍(부산), 박명국(부산), 이재룡, 최명주, 한동섭, 김기환(치안본부), 정순요 등이다. (이후 문기본, 안종임, 고경애, 문천식, 이일류, 윤경종, 민경원, 김용희, 신상영, 고평기, 노세환, 배양섭, 송봉환, 전광덕, 안락준, 이영준, 송희용, 이기안, 이창원, 김월자, 최조식, 임재현, 차영준, 황점숙, 정성, 김동규, 양승일, 이병희, 정춘동, 박은숙, 박종우, 김성준, 조희광, 김민수, 천강정, 박명희, 장성기, 김성문, 한동섭, 정순요, 이근직, 김용주, 진교남, 이원영, 성기영, 남창희, 김계성, 김경환, 유영석, 노세환, 고광선, 김기준, 이준우, 이홍배 등 중견간부들 지속적 유입)- 이상 안원전 비망록 21세기 담론에서 인용함
이렇게 유입된 신도들이 중견간부로 자리잡는 사이 안병섭은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 대학가에 세를 더 조직적으로 불리기 위해 삼척, 속리산 등지에서 전국 대학생 청년 낭가대회 등을 연례행사로 주최하며 전국대학가를 증산도 열풍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 행사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어 각종 TV, 중앙 일간지 등의 언론계에서도 증산도를 새롭게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홍보효과도 투자비용 대비 상당한 효과를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면에 안중건은 행사를 주관한 안병섭 모르게 이중으로 대포조직에게 별도의 천도교 테러사건에 대한 막후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단체가 점점 어두운 그늘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안병섭이 출판사 광고를 통해 가장 단시일하에 세를 불리고 단체가 어느정도 눈코입이 다시 생기자 안중건은 다시 시한부 개벽을 또다시 부르짖기 시작하게 되는데,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93년 대전 엑스포가 개최되면서 그 기세가 더하면서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의 사오미 광풍은 그 도가 극한에 다하게 되엇읍니다.
안중건은 사전에 종통문제에 대해 항상 불안하게 여겨 자신의 충복들을 통해 이에 방해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소위 사전 정지작업을 합니다. 자신의 종통을 위해서는 방해가 되는 성구말씀을 누락시키고 신도들이 종통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섞어놓고 천지일월 4체 조직으로 스스로를 무장하게 됩니다.
자신을 혁명하는 것이 될 수 있는 이윤의 도수는 거백옥으로 바꾸어 놓고 자신이 마지막 의통성업을 집행할 말복도수를 자임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말복도수가 되면 숙구지 공사로 깨어난 문왕의 도수를 맡으신 태사부님은 자연적으로 중복도수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감나무는 고욤나무로 변질되고 맙니다. 태모님의 세 살림이 역경만첩이었듯이 태사부님의 운암강수 만경래의 경만장 도안都安 세 살림 역시 심봉사의 맹인잔치로 변하며 말복도수를 향하게 되는 파란을 연출하고 혁명가님이 주축이 되어 상제님의 역경만첩의 장닭 세홰 울음의 말복도수가 일어나게 됩니다.